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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6·25 국군·유엔군 참전용사 이야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북쪽의 북한 인민군 야포들이 남쪽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인민군 기동부대는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또한 북한 유격대와 육전대가 동해안을 따라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했다.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무렵 육군 중위로 1개 중대를 이끌고 강원도 오대산에서 무장공비 토벌에 앞장섰던 맹보영(83) 씨는 “무장공비들이 틈만 나면 침투를 시도했지만 그렇게 갑작스레 쳐들어올 줄은 몰랐다”며 “6·25전쟁은 명백하게 북한의 남침에 의해 시작됐는데,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남한이 북침한 사건이라고 떠드는 일부 젊은이들을 보면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치민다”고 목청을 높였다.

육사 7기 출신으로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입대한 그는 6·25전쟁 당시 8사단 21연대 11중대장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여러 장병들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지휘관이었기에 잠시도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그래서 지휘관이면서도 다른 고지로 이동할 때는 1개 분대만 앞세우고 진두지휘했다. 부하들과 일체감을 높이기 위해 잠자리도 병사들과 함께하고, 식사도 같이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이끄는 11중대는 여느 중대보다 단합이 잘되고 사상자도 적은 편이었다. 인민군과 고지 점령을 놓고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면서 크고 작은 공도 세웠다. 그는 경북 풍기와 영천에서 벌인 전투를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로 꼽았다. 열하루 동안의 영천 전투(1950년 9월 2~13일)는 6·25전쟁 초기 아군에게 불리한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켜 전쟁의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구국의 일전이었다.

“풍기 전투에서는 남으로 밀고 내려오던 인민군을 역으로 공격해 이틀 동안 방어선을 구축했어요. 또 영천 전투는 국군 8사단이 인민군 2군단의 공격을 방어한 6·25전쟁의 일대 전환점이 된 전투였어요. 특히 우리 11중대가 그때 인민군 15사단의 1백22밀리 야포진지를 점령하는 전공을 세워 을지무공훈장을 받았죠.”

전쟁 중에 그가 얻은 것은 자랑스러운 훈장만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포탄 파편 2개가 허벅지 깊숙이 박혀 지워지지 않는 상처도 얻었다. 그에게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또다시 언성이 높아졌다.

“북한 인민군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전쟁 당시 제 고향인 경기 양평군에 쳐들어온 인민군이 지역 유지 5백여 명을 마을회관에 집결시켜 총살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아요. 젊은이들이 북한을 경계하지 않는 것이 걱정됩니다. 북한은 우리가 틈을 보이면 언제든 기습 도발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경기 고양시 일산에 사는 조덕제(77) 씨는 6·25를 생각하면 1953년 7월 13일 철원 373고지에서 중공군과 치른 전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6사단 19연대에서 전우애를 나눈 15중대장 최덕명 대위를 잃었다.

“최 대위는 사방이 인민군에 포위돼 작전상 철수 명령이 떨어졌는데도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작전을 수행 중이던 저한테 ‘건빵 좀 보내라, 애들이 건빵이 없어 죽어간다’고 다급하게 요청했어요. ‘건빵’은 탄약을 가리키는 군대식 은어인데, 탄약이 없어서 싸우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부하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 하지만 적군이 밀려와 철수할 수밖에 없었어요. 총을 갈겨 쏘며 가까스로 헬기에 올랐는데 최 대위의 애타는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어요.”

그의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6·25전쟁을 치르며 4개의 무공훈장을 받은 ‘용맹한 군인’은 젊음을 불사르다 그의 곁을 떠난 전우들을 가슴에 묻은 듯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둘째 큰아버지인 조소앙(1945년 충칭임시정부 외무부장) 선생 집에서 기거하며 경복중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라 정의감과 애국심이 투철한 데다 교내 학도호국단의 중대장으로 리더십도 남달랐다. 그러던 중 자신의 친지가 인민군에 의해 무참하게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발적으로 참전했다. 불과 17살 때였다.

“국군이 전쟁에서 싸울 만한 젊은이들을 트럭에 태워가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올라탔어요. 전투를 하며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꽁보리밥에 구더기가 둥둥 떠다니는 고사리국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고, 군화도 없어 낡은 천 농구화를 신고 싸웠는데도 힘든 줄 몰랐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입대 후 처음으로 쌀밥과 배춧국을 먹었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1951년 육군보병학교를 마치고 18살에 소위가 된 그는 순간 판단력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워 전투에 임할 때마다 다른 병사들의 모범이 됐다. 1952년 12월 강원 철원군 금성지구에서 싸우다 조명지뢰를 밟았을 때도 농구화와 군화, 설상화를 겹쳐 신은 덕에 발목을 잃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됐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꼬박 30년을 군인으로 살았다.

“요즘 젊은 세대는 노인을 공경할 줄 모릅니다. 경로사상의 경을 ‘공경할 경(敬)’이 아니라 ‘가벼울 경(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6·25전쟁을 치른 우리 세대의 값진 희생이 없었다면, 또 유엔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지금 없을지도 모릅니다.”

최근 6·25전쟁 참전기를 기록한 저서 <대전쟁>이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종민(88) 씨는 8연대 8중대 선임장교로 참전했다. 불과 한 달 뒤 8연대가 해체되면서 그는 일명 백골부대로 불린 18연대에 편입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3년 동안 18연대의 중대장, 부대대장, 대대장으로 최전선에서 싸웠다.

생사를 다투는 치열한 전투를 수없이 치러낸 그는 “18연대는 우리 부대원 스스로 ‘산골부대’, ‘등골부대’라 칭할 정도로 중부와 동부전선의 산악지대를 오르내리며 혁혁한 공을 세운 부대”라며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그는 “이제 노병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며 “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활발히 이뤄져 우리 후손들이 6·25전쟁의 교훈을 되새기며 살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10대 때 미군 제7보병사단 소속 전투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데일 W. 케인(76) 씨도 자신을 포함한 미 참전용사 12명의 전투 체험담을 엮은 수기 <기나긴 전쟁(The Longest War)>을 펴내 잔잔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케인 씨는 “16세 때 나이를 속여 입대했다가 한국전 참전 중 나이가 들통 나 1950년 12월 전역을 당했다”며 “1952년 다시 육군에 입대하면서 한국전에 참전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또 “지금도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휴전상태에 있을 뿐”이라며 6·25전쟁으로 분단된 우리나라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6·25전쟁 참전 상이용사인 압둘카디르 타브샨(85) 씨와 그의 큰아들 우스트네르 타브샨(59) 씨의 대를 이은 한국 사랑도 눈물겹다. 압둘카디르 씨가 한국에 파병된 것은 부인이 첫아들을 낳은 지 15일 만의 일이었다. 어떻게든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그는 한국전 참전을 자원했고 아내도 그의 생각에 반대하지 않았다. 1951년 11월 20일 부산항에 도착한 후 7개월간 춘천, 원주, 수원, 파주 등을 돌며 전투를 치렀다. 터키 2여단 1대대 2중대 1소대장이던 그는 1952년 5월 15일 오후 5시 경기 파주시 문산의 일명 스탈린 언덕에서 전투를 마치고 귀대하던 중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다. 지뢰가 터지면서 오른쪽 복사뼈 아래 발목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그에게서 한국 동요 ‘산토끼’를 배우며 자란 큰아들 우스트네르 씨는 지난해 12월 사재를 들여 한·터키 민간협력단체인 ‘앙카라서울경제협회’를 세웠다. 터키 젊은이들로 하여금 ‘한국은 혈맹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자 이 단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이 단체의 명예회장 직을 맡고 있는 압둘카디르 씨는 “한국전쟁에 참가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기에 한국에서 또다시 전쟁이 나면 다친 다리를 끌고서라도 참전할 것”이라면서 “한국은 나의 또다른 조국”이라고 밝혔다.

6·25전쟁은 이처럼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구국의지와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싸워준 참전용사들에 대한 고마움은 이 땅에서 대대손손 전해질 것이다.
 

글·김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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