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1950년 여름,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는 인민군의 공세에 국군은 전쟁 두 달 만에 낙동강까지 후퇴해야 했다. 서울에서 대전, 대구, 부산으로 수도를 옮겨간 정부는 그해 8월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구축해 사활을 건 방어전에 나섰다.
당시 19세로 서울 경신중 6학년이던 윤병국 씨도 국군을 따라 서울에서 충북 증평을 거쳐 대구로 피난을 갔다. 피난지 대구에서 ‘전장에 나가 싸우자’는 김석원 수도사단장의 격문을 본 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백인엽 대령이 이끄는 부대에 배속된 학도병 부대는 경북 의성에서 8월 10일 포항으로 이동해 곧바로 전장에 배치됐다. 전장에 투입된 바로 그날 전투는 11시간 동안 이어졌고, 책을 버리고 총을 든 학도병들은 포항을 수중에 넣으려는 인민군에 맞서 맹렬히 싸웠다. 총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이들이지만,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 전투에서 70여 명의 학도병 중 64명이 죽고 겨우 11명만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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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 윤 씨도 M1 소총을 들고 동료와 함께 싸웠지만 인민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동료들은 하나 둘 쓰러져갔고, 어느새 그만 남았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돌아서는 순간 진지에 떨어진 수류탄이 뒤에서 폭발했다.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팔과 다리에 쇠파이프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윤 씨는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 발을 디뎠지만 파편을 맞은 다리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땅을 제대로 밟지 못했다. 
그런 다리를 끌고 무작정 남으로 도망치다 미군을 만났다. 미군은 그가 포항 전투에서 살아남은 학도병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곧바로 울산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했다. 그는 파편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병상에서 한 달 반을 지낸 뒤 퇴원했다. 윤 씨가 퇴원할 무렵 전세는 역전됐다. 국군은 북진했고, 그도 다시 군에 돌아가 정훈부대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윤 씨는 아직 학생 신분이었다. 그는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의 학도병 복귀 명령에 따라 학교로 돌아갔고 살아남은 인생을 제2의 인생이라고 여겼던 그는 남은 삶을 후회 없이 살았다. 전쟁이 끝난 뒤 고향인 충남 서산으로 돌아가 지역 발전에 헌신했다.
하지만 군번 없는 학도병은 국가유공자 대접을 받기 어려웠다. 윤 씨와 다른 학도병들은 이를 바로잡는 데 평생을 바쳤다. 다행히 지금은 전투에 같이 참여한 동료의 확약서, 전투 중 공상에 대해 치료를 받은 기록 등 증거가 있으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윤 씨도 50년 넘게 외로운 싸움을 벌이다 2003년에야 행정소송을 거쳐 대한민국의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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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미국에 갔을 때 음식점 종업원이 제가 지닌 상이군경증을 보더니 쏜살같이 주인에게 가서 뭐라고 얘길 하더군요. 알고 보니 음식점 주인의 할아버지가 한국전 참전용사였대요. 즉석에서 참전용사 파티가 열렸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정반대예요. 참전용사 모자를 쓰고 거리에 나서면 소 닭 보듯 합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인사를 건네기는커녕 자리 양보하는 젊은이도 보기 힘들어요. 조국을 지킨 용사들이 내 조국보다 미국에서 더 대우받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2008년 윤 씨는 학도의병동지회를 만들었다. 자신처럼 명예회복을 하지 못하고 답답한 세월을 살아야 했던 학도의병 동지들을 위해서였다. 학도병은 과거에 ‘의용군(義勇軍)’으로 불렸지만 그는 “학도병은 조국을 위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의병(義兵)’과 같은 의미로 불려야 한다”며 이름도 ‘학도의병동지회’로 지었다.
“제가 눈 감기 전에 할 일은 동지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2008년 이 모임을 만들었어요. 제 몸은 성치 않지만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참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명예를 찾을 수 있다면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윤 회장은 팔십 노구를 이끌고 의병동지회 사무를 직접 처리하고 있다. 그는 매월 9만원 정도 유공자 수당을 받는다. 이 돈을 전부 전화비로 쓴다. 청와대 등 정부 각 부처에 학도병과 관련된 내용을 전하기 때문이다.
윤 회장은 “교과서에 학도병 얘기가 실려서 자라나는 후손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희생정신을 배웠으면 한다”며 “다행히 교육과학기술부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행정안전부에는 의병동지회를 비영리단체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해 현재 절차를 밟고 있다.
“며칠 전 현충원에 갔더니 유치원생들이 잔뜩 왔더군요. 아이들에게 6·25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두세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어린 세대가 전쟁을 기억하고, 우리 같은 늙은이의 희생을 기억해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요.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평화는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키는 것’이란 말을 국민 모두가 기억했으면 해요.”
글과 사진·공감코리아(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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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