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SET_IMAGE]1,original,right[/SET_IMAGE]1949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만들어진 ‘국새’가 첫 번째 국새, 박정희정권 때 사용된 국새가 그 두 번째 그리고 1999년에 이어 2008년 대한민국 4대 국새가 탄생했다. 

2008년 출범하는 새 정부는 또 하나의 새로운 상징물과 함께 출범한다. 바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4번째로 제작된 ‘4대 국새’가 새 정부부터 사용되기 때문이다. 국새는 ‘국새규정’에 따라 헌법공포문 전문, 훈·포장증, 중요 외교문서 등에 날인되는 나라의 인장으로 대통령령인 ‘국새규정’에 근거하여 사용된다.

행정자치부는 지난 2006년 12월 국민 공모를 통해 국새 제작 전문가인 민홍규 씨의 작품을 선정했다. 당시 행정자치부는 “봉황의 모양이 세련되고 조각 기법이 뛰어나 국새의 품위를 충분히 담고 있으며, 글씨 또한 획의 기운이 생동해 국운 융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후 국새제작단이 꾸려져 2007년 4월부터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 지난 1월 국새의장품 16종을 함께 세상에 내어 놓았다. 행자부는 이번 국새의 공식명칭을 ‘4대 국새’로 정했다.


실용성과 예술성 조화 1년 제작
“지금 한국이 세계를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기회잖습니까? 그래서 국새에도 힘이 넘치는 생동감을 담으려고 했죠. 본래 봉황의 비상은 날개를 활짝 펴야 하지만, 국새로써의 기능성도 따져야 하니까 어려웠죠. 날개를 너무 펴면 인장을 찍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두 날개를 한껏 들어 올린 상태를 형상화했죠. 이제 막 날아오르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정지한 듯 보이기도 하지요. 봉황이 구름에 살짝 내려앉은 모습이라고 할까요?”

경남 산청에서 만난 민홍규 선생은 약 1년 동안 진행된 국새 제작 스토리를 풀어놓았다. 민씨는 1대 국새를 제작했던 고 정기호 선생(1899~1989)의 제자로 조선시대 옥새 복원에 매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복원된 총 70여 종의 조선시대 옥새 중 35개를 제작했다. 이번 국새 제작에는 전체적으로 실용성과 예술성을 모두 담으려고 했으며, 이를 위해 현대적인 기술공학기법을 많이 고려했다고 했다.

“예술적으로 당초문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당초문이란 구름처럼 구불구불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의 카오스이론이라고 할 수 있죠. 깃털과 가슴에도 당초문을 많이 사용했는데, 힘을 상징하는 동시에 각 부위를 연결하는 이음새 작용을 해 인장을 찍을 때도 위에서 누르는 하중을 지탱해 줍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느낌은 역시 힘이다. 위로 불끈 솟아오른 튼실한 가슴팍은 권위를 상징하며, 오조(五爪)를 하고 있는 발은 주먹을 쥐고 있는 것처럼 단단한데 이는 장중함과 엄숙함을 상징한다. 이런 상징은 국새를 전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태극권의 기본자세를 취한 모습에도 잘 담겨 있다.

또한 길게 늘어뜨린 꼬리는 결집을 상징한다. 국새의 봉황은 긴 꼬리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머리끝 부위까지 올라와 벼슬과 맞닿아 있으며, 하나는 뒷날개와 맞닿아 있다. 결집의 의미를 담기 위해 이렇듯 봉황의 각 부위가 결국은 서로 맞닿도록 디자인한 것이다.






국민화합 뜻 담아 9개 지역 흙 사용
민 선생의 국새 작업은 구상부터 주물까지 한꺼번에 염두해 온 종합예술 작품이었다. 최초 디자인을 구상할 때 주물을 어떻게 부을 것인지까지 고려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현대적인 주물 기법으로는 어렵다고 한다. 그는 스승에게 배운 진흙을 이용한 주물 기법을 사용했다. 일단 밀랍으로 모델을 제작한 다음, 이 모형의 4면을 각각 본을 떠 진흙 거푸집을 만든 것이다. 거푸집은 전국 각지의 고령토를 사용했는데, 국민 화합을 염원하는 의미로 9개 지역의 흙을 사용했다.

인뉴 조각(손잡이 부분)뿐만 아니라 글씨인 인문전각 또한 은근한 힘이 넘치도록 했다. 본래 국새의 글씨체로 써왔던 훈민정음체는 그렇게 역동적인 글씨가 아니지만, 파워풀하게 보이도록 힘 있는 획을 새겨 넣었다.

그는 스승에 이어 국새를 제작하면서 “절대 공예품을 만들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솜씨만 알아주는 매끈한 작품이 아니라 팽팽한 에너지가 감도는 작품이 그가 원하는 바였다. 이 국새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국민들이 힘이 넘치도록, 파워 있는 국가가 됐으면 하는 염원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른 뒤 후세 사람들이 한국에도 국새를 잘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했고, 또한 그 것이 가장 두려웠다. 현재 일본과 중국에는 국새 장인이 남아 있지 않다. 나 또한 뒤늦게 스승의 슬하에 들어갔는데, 지금부터라도 후학을 키우고 싶다.” 한창 진행 중인 조선시대 옥새 복원 작업을 위해서라도 제자를 키우겠다는 의지다.

그는 마지막으로 “의미가 축소되기는 했지만, 국새는 언제나 한 국가를 상징한다”며 “4대 국새에 새겨진 의미가 오랫동안 간직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통공예 진수 집대성

국새의장품 16종 현존 최고 장인들 총출동


 이번 국새 제작이 과거와 다른 점은 국새의장품 16종을 현존 최고의 장인들이 직접 참여해 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제작 방법으로 조선시대 국새에 관해 기록한 문헌 <의궤>에도 나와 있다.

국새의장품 16종은 매듭, 자수, 침선, 칠, 소목, 배첩, 두석, 칠피, 종이배접 등 해당 분야의 최고의 장인들이 집대성하여 만든 작품으로 전통예술의 완결이자 전통공예의 진수를 담고 있다. 국새를 담는 인궤는 소병진 소목명장, 박성규 칠피명장, 작문열 중요무형문화재 두석장, 홍종진 충북무형문화재 배첩장, 엄익평 서울시무형문화재 옥장 등 각 분야 최고 전문가가 참여했으며, 국새를 놓는 반침인 석은 석을 제작한 전통한지 공예가 김혜미자 교수가 제작했다. 석(席)은 겉보기에는 비단 같지만 한지 200장을 1800겹으로 접은 것으로, ‘한지로 만든 석을 썼다’는 기록에 근거해 복원한 것이다.

또한 나무틀인 백골을 제작한 소병진 명장은 200년 전 전주 사찰에 사용했던 춘향목을 사용했고, 과피는 철갑상어가죽, 뉴 조각은 ‘춘천옥’을 사용했다. 특히  이번에 사용한 상어가죽은 박성규 칠피명장이 두 달 동안 전국의 어시장을 모두 찾아 헤맨 끝에 찾아낸 것이다.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