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시작부터 귀여운 꼬마 ‘조이’에게 시선을 뺏긴다. 40년 전 미국 뉴욕 브루클린. 줄서는 맛집에서 빵을 사오는 길이다, 엄마 심부름인 모양. 바게트 두 덩이와 체폴레(이탈리아 전통 도넛) 12개가 봉지에 가득 담겨 있다. 가는 길에 다 먹으면 안 된다고 빵집 아저씨가 경고했지만 무색하다. 꽃집 앞을 지날 때도, 아빠에게 붙들려 자동차 바퀴를 닦고 있는 친구 브루노와 인사할 때도, 조이는 체폴레와 사랑에 빠져 있다. 엄마와 할머니의 주방에 도착했을 때 남은 건 바게트뿐.
주방엔 맛있는 소리가 가득하다. 저마다 리듬을 갖춘 도마질 소리, 냄비에서 수프 끓는 소리…. 귀를 열면 죄다 음악이다. 형형색색의 식재료와 음식은 또 어떤가. 코를 자극하는 냄새는 할머니가 요리하는 ‘선데이 그레이비(육즙과 채소를 넣은 이탈리아식 소스)’다. 논나(할머니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레시피로만 가능한 특식이다. 바질 한 잎을 떼어 소스에 넣자 조이가 논나에게 묻는다.
“얼마나 쓸지는 어떻게 알아요?”
“마음에서 느껴지지. 네 마음을 담는 거니까.”
세월이 한참 지났고 장면은 바뀌어 엄마의 장례식이다. 어른이 된 조이는 조문하는 친구와 이웃 사이에서 슬픔을 애써 누르고 있다. 조이는 아직 싱글이다. 엄마 마리아를 잃고 나니 이제 가족이 없다. 가족이 없다는 건 사랑이 없다는 뜻. 허전한 마음에 뜻 없이 배회하는 날이 늘어간다. 배를 타고 건너는 뉴욕의 스태튼아일랜드. 그러다 만난 운명의 식당이 거기 있었다. 폐업한 낡은 식당을 개조해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개업해보기로 마음먹는 조이. 절친 브루노가 극구 만류했지만 기어코 엄마가 남긴 보험금까지 털어 넣었다. 워낙 없던 살림에다 빚까지 졌다. 굳이 왜 그런 모험을 택했을까. 그리 예리하지 않아도 나도 당신도 쉬 알아챌 수 있다. 셰프도 아니고 식당 운영 경험도 없는 그가 굳이 모험을 택한 이유, 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가족을 다시 만들고 그래서 사랑을 되찾고 싶은 것. 그래야 자신이 다시 숨 쉬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긴 듯하다.
우여곡절 끝에 논나가 요리하는 식당을 개업하는 조이. 식당 이름은 ‘에노테카 마리아’. 엄마의 이름을 따고 할머니의 레시피에서 영감을 받았다. 조이는 엄마의 친구와 지인, 시장에서 만난 이웃을 모아 논나 셰프 4인의 주방을 만든다. 원 고향 이탈리아의 맛, 할머니가 만든 따뜻한 집밥의 맛을 선사하는 식당이다. 어린 시절 보고 듣던 미술과 음악의 향연, 그 주방이 재현될 터였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개업 첫날 억수 같은 비가 내렸고 손님은 브루노 부부가 유일하다. 동네 토박이들은 낯선 이방인의 식당을 고의로 외면한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사정은 마찬가지. 어렵게 의기투합한 논나 셰프들도 지쳐간다. 마침내 영업을 접기로 결심하고 ‘쫑파티’를 열기로 한다. 제대로 장사해보지도 못해 주방에 남은 식재료가 너무 많았다던가.
늘 그렇듯 극 후반부에 반전이 따른다. 가게를 접기 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맨땅에 헤딩’을 감행했던 게 잭팟을 터트린다. ‘에노테카 마리아’의 음식을 싸들고 미식가이자 인플루언서인 매거진 편집장을 직접 찾아갔던 것. 마침내 특집기사가 나가고 동네 토박이들도 쫑파티 날에서야 처음 방문하고 오해를 푼다. 맛이야 따로 설명할 필요 있을까. 논나들의 요리는 보기만 해도 침샘을 자극한다. 할머니들의 손맛에 탄성이 쏟아진다. ‘에노테카 마리아’는 죽다가 살아난 전설의 식당이 된다. 마지막 킥 하나 더. 뒤늦게 엄마가 남긴 편지에서 할머니와 엄마의 레시피가 발견된다. 왜 진작 열어보지 않았을까. 마지막 편지를 열어 보면 엄마와 마지막이 되는 거라 여겼던 탓이다. 웃을 일이 더 많은 영화지만 무방비로 눈물샘이 출렁이는 대목도 곳곳에 있다.
매년 5월 둘째 주 일요일은 미국의 ‘어머니 날’이란다. 넷플릭스는 2025년 5월 바로 이날에 맞춰 ‘논나’를 공개했다. 이탈리안 할머니들의 식당 창업기인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에노테카 마리아’는 지금도 같은 장소에서 운영 중이다. 영화 속 사정과 달라진 점은 식당이 그때보다 더 잘된다는 것, 그리고 이탈리안 논나뿐 아니라 세계 각국 할머니들의 레시피를 맛 볼 수 있다는 것. 지아, 로베트타, 안톤넬라, 테레사만으로도 시끌벅적했던 주방이 얼마나 활화산처럼 뜨거워졌을까 상상해본다. 생각해보라. 독일 논나, 스페인 논나, 중국 논나가 다 모이고 거기에 한국의 ‘욕쟁이할머니’까지 더한다면?
실은 재난극 탈을 쓴 SF 영화 ‘대홍수’를 먼저 봤다. 차갑고 축축한 데다 복잡하고 난해하니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로봇, 이모션 엔진 따위를 쉬 이해하고 잘 설명해낼 재간도 없었다. 해를 넘기는 추운 계절엔 따뜻한 것이 좋지 않은가. 나고 자란 고향과 어린 시절과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등장하니 아주 그만이다. ‘논나’를 만나는 동안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었다. ‘토스카나’(2022), ‘아메리칸 셰프’(2014), ‘로맨틱 레시피’(2014), ‘줄리&줄리아’(2009)를 함께 권한다.
글 이상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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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