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느낄 때 우리는 쓸쓸해진다. 하지만 스스로는 어떨까. ‘나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나’ 살펴보면 만족스러운 답을 얻기 어렵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단번에 판단하면서 스스로는 입체적이고 다층적이라고 여겨 내 마음은 나에게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쓸쓸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일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여기에 ‘그냥’은 없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 왜 거기에 끌렸는지 집요하게 묻고 해답을 찾아야 한다. 성실하게 묻고, 진실하게 답하다 보면 나 자신과 조금은 친해질 수 있다. 혹자는 이를 ‘취향’이라 부른다. 무작정 대세를 좇기보다 가만히 자기 마음에 집중하는 자세다.
17세기 유럽의 ‘살롱’은 그런 곳이었다. 비슷한 취향을 공유한 이들이 사랑방에 모여 자유롭게 토론했다. 서로의 사생활이나 일상다반사가 아니라 오직 관심사에만 집중했다. 작품을 낭독하고, 비평을 나누던 게 대표적인 살롱 문화다. 프랑스 귀족은 자신의 자택에서 사랑, 정념, 재능, 명예, 야심 등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화제로 삼아 생각과 말을 단련했다. 이 세련된 말은 훗날 잠언이나 문학으로 남기도 했다. 그 내밀한 사랑방이 다시 부활했다. 숨 가쁜 하루가 지나고 저녁이 되면, 저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저마다의 사랑방에 모여든다. 그곳에서 희미해진 눈동자는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충만해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이른바 ‘소셜 살롱’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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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에 취하다
소셜 살롱 ‘문토’의 이미리 대표는 기존의 동호회와 문토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반 동호회는 주제에 따라 사람들이 모이죠.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면 때론 모이는 것만으로도 좋을 때가 있죠. 하지만 단순히 모이기만 했을 때 그 경험이 지속적으로 유의미하고 깊어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희 모임에는 ‘좋아하는 것이 명확하며, 주제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인 리더가 함께합니다. 이를테면 현대 미술 모임에는 미술 전문지 에디터가 리더로 참가해 동시대 현대 미술의 지금을 살펴보고 미술관에 가 작품을 함께 관람합니다. 문토에서 갖는 모임은 일반 동호회처럼 취향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보다 깊이 있게 관심사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되지요.”
이미리 대표는 IT 기업에서 기획자로 근무했다. 5년여의 직장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연극과 영화를 좋아하던 그는 퇴근 후 함께할 수 있는 작은 모임을 만들기로 했다. 다만 함께 보고 즐기는 모임이 아니라, 함께 연기 워크숍을 진행하고 영화도 만들어보는 모임이었다. 연극 소모임에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배우가, 영화 소모임에는 영화 전문지에서 일하는 기자가 함께했다. SNS에 올린 공고에 많은 사람이 응답했다. 자신과 비슷한 욕구를 가진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걸 알았다.
“‘문토’라는 이름은 ‘묻고 토론한다’는 뜻이에요. 취향은 질문하는 일입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며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좇다 보면 분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생깁니다. 남들이 좋다고 해서 좋은 것, 나쁜 것이 아닌 분명한 나만의 관점, 나만의 것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취향이라고 생각하고, 저도 그렇게 해서 저만의 고유한 관점과 시선의 집합인 취향을 길러왔습니다.”
어른이 되어 만난 신세계
퇴근 후 아지트였던 ‘문토’가 그의 창업 아이템이 된 건 자연스러웠다. 평일 2시부터 11시까지 소그룹 모임이 이어졌다. 문은 이미리 대표가 열었지만, 모임들은 저마다의 생명력을 가지고 분화되고 자라났다. 현재 문토에서 운영하고 있는 모임은 다채롭다. 아무 글이든, 아무렇게나 쓰는 ‘아무 글방’, 오랫동안 사랑받는 것들에 대해 토론하는 ‘사적인 브랜드’, 아는 만큼 들리는 음악 모임 ‘클래식 수다 모임’, 유쾌한 미식가들의 밤을 채우는 ‘셰프의 테이블’ 등이다. 글쓰기 모임의 경우, 모임을 가질 때마다 함께 글을 쓰고 나눈다. 문토의 모임은 석 달을 주기로 격주로 이뤄진다. 오직 글에만 집중하는 시간이고, 대화도 오직 글에 대해서만 나눈다. 누군가에게 나의 글을 보여주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 글을 누군가 정성껏 읽고 좋았던 문장과 아쉬웠던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규칙적으로 쓰는 일’부터가 그렇다. 문토의 글쓰기 모임은 함께 문집을 만들거나 독립출판물을 만드는 식으로 성장했다.
▶ 1 생활경제 지식을 나누는 모임 ‘결국은 경제다’
2 ‘생각하는 주방’에서는 나와 먹거리의 관계를 조망한다.
3 ‘거기서부터 쓰기’ 모임은, 실제 글을 쓰는 일로 모임을 시작한다.
4 ‘나와 만나는 주방’ 모임에서는 야외에서 운동을 진행하기도 한다.
5 ‘셰프의 테이블’에서는 실제 재료를 구하기 위해 나가보기도 한다. ⓒ문토
“저도 모든 모임에 참관하러 자주 게스트로 들어가곤 해요. 저도 때론 문토의 모임을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내 안의 고유한 가능성과, 또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는 점들이 있더라고요. 특히 요리 모임의 경우 미식과 먹는다는 행위에 관심이 없던 제가 삶에서 충만하게 먹고 마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준 소중한 모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때로는 바빠서, 때로는 귀찮아서 나한테 제대로 된 한 끼를 대접한 적이 없었고, 기껏 먹는다는 것도 끼니를 때우듯 대충 먹고 살더라고요.”
이미리 대표는 문토의 기획자이자 참여자다. 모임을 통해 얻게 된 영감은 다시 새로운 모임을 만드는 동력이 된다.
“문토의 요리 모임을 기획하고 함께 참가하며 나 자신을 위해 좋은 식재료를 고르고, 정성 들여 차려내고, 또 혼자가 아니라 함께 웃고 떠들고 얘기하며 마주하는 식탁이 얼마나 자신을 위로하고 충만하게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저도 자주 멤버로 모임에 함께 참여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클래식 음악 모임에 참여했던 이는 모임 후기에 “뾰족했던 나의 취향이 넓어진 느낌이었다”고 썼다. 혼자서 음악을 즐기다 보면, 듣는 음악만, 좋아하는 뮤지션만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의 추천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그 묘미를 맛보면 모임이 기다려진다. 나와 너의 연결고리를 찾은 기분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경험의 틀과 자장의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만남을 통해서만 우리의 세계를 넓힐 수 있지요. 혼자 힘으론 쉽지 않아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때 세상을 보는 시야와 관점, 취향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매일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매일 가는 곳만 가던, 어른이 된 우리에게는 정말로 새롭고 멋진 경험이죠.”
이미리 대표는 몇 번이나 ‘멋진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창업을 꿈꿔본 일은 없지만,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다시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또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늘 기대된다.
“내 안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보다 다양한 취향의 모임을 개발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취향은 보다 개별적이고 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 넓은 스펙트럼의 범주로 확장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다채로운 취향의 모임을 제공하기 위해 애쓰고 있고, 고민이라기보다는 중요 과제로 생각하고 있어요.”
실제로 한 모임에 회원으로 참여했던 이가 다른 모임의 리더가 되는 일도 있다. 개설되는 모임 중에 ‘이직의 비법’도 있는데 그는 원래 영화 모임에 참여하던 이였다. 그의 경력이 다채로워 새로운 모임을 구상하게 되었고, 그 모임의 리더로 초청하게 됐다.
“현재 모든 모임은 문토의 기획하에 만들어지고 매뉴얼 및 커리큘럼에 따라 진행되고 있습니다. 함께 질문하고 나누면서 풍요로워질 수 있는 다양한 범주의 주제를 선정해 모임을 꾸리고, 그 모임을 이끌 수 있는 적합한 리더를 섭외합니다. 리더의 기준은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고, 주제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지식과 통찰을 나눌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섭외를 진행하기도, 리더를 신청하신 분 중에 선발하기도 하죠.”
전문가의 일방적인 가르침이나 학원식 사교육보다는 ‘산지식’을 원하는 이들이 있다. 그 지식이 자신의 경험과 조우해 풍성한 내면을 만들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시간을 내고 모임에 참여한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모임이나 스펙을 쌓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모임이다. 그렇게 나를 찾아가다 보면 뜻밖의 신세계가 열린다. 나와 함께 수십 년을 살아도, 나의 어느 부분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연기 워크숍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분들이 참여하세요. 세월이 쌓일수록 자기 안의 조각들이 많잖아요. 그 조각을 꺼내서 연기에 활용하면, 젊은이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내공이 나와요. 대학 때 동아리를 하면서 느꼈던 재미와는 또 다른 감동이죠.”
문토의 관심은 ‘나를 찾는’ 데 있고, 이 모임은 때로 밤 11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야근이라면 심신이 피폐해졌을 시간이 이곳에서는 심신이 깨어나는 시간으로 바뀐다. 덕분에 이미리 대표는 야근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쉴 때 일하고, 일할 때 쉬는 생활이 분명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함께 좋아하는 것을 나누고 풍요로워지는 따뜻한 저녁을 보내고, 멤버들이 뿌듯하고 즐거운 얼굴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밤늦게 퇴근하는 그 시간이 그렇게 힘들게만은 느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