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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2,original,center[/SET_IMAGE]아무리 삭신이 쑤셔도 병원에 갈 엄두조차 못내었다. 그럴 때면 베틀을 찾았다. 베틀에만 앉으면 아픔도 사라졌다. 아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더 큰 아픔으로 차라리 작은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거기에 시어머니의 구박은 왜 그리도 맵고 시린지….
그 옛날 아낙들은 그렇게 물레질을 배웠다. 아무리 고된 들일을 하고 나서도 야심한 밤까지 베틀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배운 물레질이 평생 친구가 되어버렸다. 지루하기만 한 농촌의 밤, 베틀이 있어 낙을 삼고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고통이 끝이 없어도 멀리하면 아쉬운 게 길쌈이었다. 저녁참에 베틀에 앉으면 새벽녘이 돼야 내려올 수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가벼웠다. 그 밤의 길이만큼 명주 자락도 길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길쌈은 애쌈이오.”
애간장을 끊는다 해도 이만한 고통에 견줄까? 한 번 건너가면 그만인 인생길에 고생줄은 명주실처럼 질기고도 길었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두산리 양지마을.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명주를 길쌈하는 마을이다. 30여 가구 되는 마을에서 열다섯 가구가 명주 길쌈으로 업을 삼는다. 50대 한 명에 나머지는 모두 70대다. 시집올 때 신랑 바지저고리 감을 짜는 것으로 시작한 일이 일흔 넘어까지 계속되는 셈이다.
입으면 말 그대로 비단결이 몸에 살살 감기지만 그 한 올 한 올은 한(恨)으로나 엮을 수 있는 고행이었다. 고치에서 실을 뽑아 솔기를 잇고 베를 내 베매기를 거쳐 베틀에 얹어 천을 짠 다음 콩대를 태운 잿물에 담가 비로소 부드럽고 윤이 나는 명주 한 필을 만들기까지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1년이면 겨우 여남은 필을 짜 남편 먼저 보낸 홀몸으로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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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주름진 얼굴과 손마디만 남고 그나마 이어받을 사람이 없으니 머지않아 사라질 일이다. 어쩌면 자식들만큼은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벗어났음을 다행으로 여길까? 남은 힘을 모아 명주 한 필 곱게 짜 저승 갈 때 입고 갈 수의 한 벌 지으면 한이나마 없을까? [RIGHT]사진·권태균/글·이항복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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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