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한 차돌박이에 다양한 채소, 몽글몽글한 순두부를 매콤하고 감칠맛 나게 끓인 ‘차돌박이순두부’는 저녁 식사에 잘 어울리는 찌개다. 밥이 술술 넘어가는 칼칼한 맛이라 밥도둑이 따로 없다. 하지만 찌개를 하고 애매하게 남은 차돌박이, 호박, 버섯, 양념장 등은 처치가 곤란하다.
1인이나 2인 가구의 경우, 장을 봐서 한 끼 밥을 해먹는 일만큼이나 남은 식재료를 처리하는 게 골칫거리다. 이 고민을 해결해주는 게 바로 밀키트(Meal Kit)다. 밀키트는 쿠킹 박스 또는 레시피 박스라고도 불린다. 말 그대로 장보기, 손질, 재료 낭비 없이 집밥을 해먹을 수 있는 선물상자다. 한 끼 식사의 재료와 레시피가 담긴 밀키트로 차돌박이순두부를 주문해보자. 차돌박이 80g, 순두부 800g, 쥬키니호박 40g, 양파 60g, 대파 20g, 청양고추 5g, 홍고추 5g, 고추기름 10g, 찌개소스 100g이 집으로 배달된다. 각 재료는 이미 손질을 마친 상태다. 만드는 방법은 동봉된 레시피를 보면 된다.
요리하는 재미와 먹는 즐거움
지난 7월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와 한국 HMR(Home Meal Replacement, 가정간편식)협회가 주최한 ‘2018 HMR 월드마켓포럼’에서 가정간편식의 키워드로 ‘편의성, 맛, 영양 그리고 스토리’가 꼽혔다. 1세대 간편식이 3분카레, 삼각김밥 등으로 편의성을 중시했다면 2세대는 여기에 맛을 더한 즉석밥, 즉석죽 등이 있다. 3세대는 편의성과 맛, 영양이 함께한 레토르트 국과 반찬 등이 소비자를 사로잡았다. 현재 간편식은 4세대다. 편의성에 맛, 영양은 기본이고 여기에 스토리가 가미된다. 이미 간편식이 대중화된 서양에서는 유명 셰프들의 레시피를 담은 간편식이 유행 중이다. 소문난 셰프나 소문난 맛집의 음식을 그대로 담았다는 ‘스토리’는 소비자들의 까다로워진 입맛을 충족시켰다. 양호승 GS리테일 밀키트 팀장은 “밀키트는 1차 집밥, 2차 외식, 3차 HMR에 이어 4차 식문화의 변화를 가져올 새로운 카테고리다. 최고 품질의 먹거리를 통해 국내시장을 개척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3분카레’가 등장한 게 1981년, 37년 만에 간편식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간편식 시장 규모는 2016년 2조 3000억 원을 넘어섰다. 5년 전과 대비하면 세 배 성장한 셈인데 2017년, 2018년의 성장세는 더 가파르다. 곧 3조 원을 돌파하리라는 게 업계의 예상이다. 실제로 ‘집밥 백선생’, ‘냉장고를 부탁해’, ‘윤식당’, ‘수미네 반찬’ 등 연이은 쿡방의 성공은 요리에 대한 감수성을 높였다. “참, 쉽쥬?”라는 백종원의 유행어처럼 만들기는 쉽고, ‘냉장고를 부탁해’의 제한시간 15분처럼 오래 걸리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만들 수 있는 품격 있는 음식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따라 하다 보면 어느새 요리하는 즐거움도 배가된다.
가정 식료품 배달 서비스는 2007년 스웨덴에서 시작됐지만 ‘집에서 즐기는 일품 요리, 밀키트’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2012년 스타트업 블루에이프런이 식재료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후 아마존은 칼질조차 필요 없이 모든 준비가 완료된 밀키트 배송을 시작해 판을 키웠다. 간편식의 대표주자인 일본의 편의점 브랜드 세븐일레븐과 로손도 밀키트 배송 서비스를 시작했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차이는 업무 시간에 있다. 미국은 9시 출근 5시 퇴근 문화가 자리 잡혀 집에 도착하면 6시에 식사를 준비할 수 있다. 때문에 이들의 밀키트는 ‘대신 장봐주기’ 개념이 크다. 한국은 퇴근이 6시가 넘는 직장이 많다. 그러다 보니 한국식 밀키트는 ‘조리 시간을 줄여주는 완제품’ 성격이 짙다. 외식하는 것보다 간편하면서도 신선한 집밥을 만드는 게 목표다.
요리는 다른 어떤 가사 활동보다 노동 강도가 높다. ‘오늘 뭐 먹지’를 정해야 하고, 먹고 난 뒤에는 설거지와 음식물 쓰레기 처리도 해야 한다. 그럼에도 외식은 비용이 많이 들고, 패스트푸드는 영양이 부족하며, 편의점 간편 도시락을 매일 먹을 수는 없다. 조리기구만 준비돼 있다면 밀키트는 좋은 대안이다. 셰프만 빼고 모든 게 배달되는데 이 정도 박스라면 누구나 셰프가 될 수 있다. 시간을 아끼고, 남는 재료를 절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레시피’에 도전이 가능하고 더 건강한 식사를 할 수 있다.
▶ 1 잇츠온의 월남쌈 밀키트 ⓒ한국야쿠르트 2 심플리쿡에서 제공하는 가지구이 레시피 ⓒGS리테일
‘따라 하기 쉬운’ 조리법을 제공하거나 유기농 재료를 쓰는 업체는 더 인기를 모은다. 국내에서는 GS수퍼마켓과 편의점 GS25를 운영하는 GS리테일이 처음 밀키트 배송 서비스를 시작했다. GS리테일은 지난해 12월 밀키트 전국 무료 배송 서비스 ‘심플리쿡’을 론칭했다. 심플리쿡은 요리에 필요한 식재료를 바로 조리할 수 있는 상태로 포장해 레시피와 함께 제공한다. 이들은 ‘밀 솔루션’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론칭 2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2만여 개를 돌파했다. 메뉴는 감자탕, 닭볶음탕 등 한식부터 큐브스테이크, 빠네크림파스타, 스키야키, 월남쌈 등 16가지에 이른다.
롯데마트는 밀 솔루션 자체 브랜드 ‘요리하다’를 선보였다. 요리하다 제품군은 용기째 끓이기만 하면 되는 상품부터 밀키트 제품까지 다양하다. 소비자의 반응이 좋아 외국 요리로 라인업을 확대했다. ‘요리하다 상하이 깐쇼새우’와 ‘요리하다 유산슬’이 대표적이다. 이 제품은 전년 대비 70.2%의 성장을 기록했다. 이마트는 홈베이킹에 진출해 베이킹 믹스 PB 제품인 ‘피코크 베이킹 믹스’를 출시했다. 피코크 베이킹 믹스는 ‘소프트 쿠키’, ‘초코칩쿠키’, ‘브라우니’ 등 5종으로 구성됐다. 달걀이나 버터 등의 재료만 준비해 레시피대로 따라 하면 집에서도 손쉽게 쿠키나 빵을 만들 수 있다. 이 역시 2017년 5월 출시 이후 누적 매출 15억 원, 월매출 1억 5000만 원을 기록해 상품 라인업이 더 늘어날 예정이다.
집에서 즐기는 전 세계 일품요리
한국야쿠르트에서 배달하는 간편식 브랜드 ‘잇츠온’은 출시 1년 만에 일평균 1만 개 판매를 돌파했다. 야쿠르트 ‘아줌마’가 직접 배달한다는 차별화를 노린 이 제품은 셰프의 킥이 더해져 인기를 모았다. 잇츠온 밀키트는 셰프와 손잡고 출시한 ‘비프찹스테이크’, ‘치킨라따뚜이’ 외에 ‘프라임스테이크’, ‘돼지고기짜글이’, ‘초계국수’ 등 총 29종의 제품으로 구성돼 있다. 가장 인기를 끄는 메뉴는 스페인 요리인 ‘감바스’다. 감바스 밀키트를 주문하면 새우, 마늘, 페페론치노, 바질, 올리브오일, 빵 등이 담긴 박스가 배송된다. 20~30분이면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파는 듯한 감바스를 즐길 수 있다. 실제로 각 요리에는 유명 셰프의 얼굴이 함께한다. ‘서울식 소불고기 전골 키트’의 경우 ‘올리브 매거진 코리아’에 출연한 김현 오너셰프의 레시피가 담겨 있다.
▶ 1 현대백화점에서 시작한 셰프박스 서비스 ⓒ현대백화점 2 한국야쿠르트 잇츠온에서는 야쿠르트 아줌마가 배송을 담당한다. ⓒ한국야쿠르트
▶ 샐러드, 후식, 음료까지 포함된 밀키트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한국관광공사
배송에서 강점을 보이는 한국야쿠르트는 지난 4월 한 번 주문하면 한 달 치 간편식을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는 정기배송 서비스도 시작했다. 영양 전문가와 피트니스 전문가가 참여한 식단이다. 여기에 간편식과 디저트를 함께 즐기는 ‘잇츠온 프로그램’도 추가했다. 샐러드와 죽 베이글 등의 간편식 제품에 발효유, 우유, 커피 등을 함께 배송하는 프로그램 식단이다. 닭가슴살샐러드 그린 키트를 주문하면 퀘이커 오트밀, 전복죽, 하루 과일 등 세트 제품이 구성되고 여기에 한국야쿠르트에서 생산하는 발효유와 커피가 더해진다. 이 역시 야쿠르트 ‘아줌마’가 직접 배송한다.
홈쇼핑과 백화점도 밀키트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NS홈쇼핑은 업계 최초로 밀키트 브랜드 ‘프레시지 쿠킹박스’를 론칭했다. 영상을 통해 조리 시연과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게 이들의 강점이다. 현대백화점은 지난 4월 업계 최초로 고급 식재료와 고급 레스토랑의 레시피를 접목시킨 밀키트 ‘셰프박스’를 선보였다. ‘셰프박스’는 6월까지 무역센터점 매장에서만 5000여 개가 판매됐다. 보통 백화점 식품관에서 판매되는 가정간편식(HMR)보다 세 배 이상 팔린 수치다. 특히 6월 판매량은 2500개로 5월보다 판매량이 500개가 늘었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판매의 절반가량이 주말을 위해 장을 보는 시간인 금요일 오후 5시 이후와 토요일 낮 12시 이전에 판매됐다.
온라인 오픈마켓 티몬, 11번가 등에서도 밀키트의 인기가 높다. 티몬에서는 올해 상반기만 밀키트 월매출이 54% 성장했다. 밀키트 상품을 가장 많이 주문한 고객은 30대로 전체의 49%를 차지했다. 양호승 GS리테일 심플리쿡 팀장은 “주 52시간 시행이 앞당겨지면서 일찍 귀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고, 건강한 밥을 먹고 싶다는 웰빙 문화도 확산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와 맞물려 있어 밀키트 시장도 점차 확대되고 성장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추천 밀키트
집들이엔 일품요리, 밀푀유나베
‘천 개의 잎사귀’라는 뜻의 밀푀유는 손님을 초대했을 때 내놓기 좋은 요리다. 밀키트로 주문하면 밀푀유나베에 들어가는 재료 소고기, 배추, 깻잎, 청경채, 표고버섯 등 버섯류, 숙주뿐 아니라 감자 수제비, 다시마, 나베 육수와 소스 등이 배송된다. 가격은 2만 원대(2인 기준).
캠핑에는 바로 해먹을 수 있는, 캠핑 키트
캠핑에서 빠질 수 없는 게 고기 요리다. 꽃부채살 소양념구이를 구입하면 갈비소스와 양송이는 물론 대파채와 통마늘, 청홍고추도 배송된다. 고기는 양념에 재워진 상태로 배송되기 때문에 캠핑장에서 그대로 불판 위에 올리면 된다. 가격은 3만 원대(2인 기준).
부모님 생신에는, 생신상 세트
부모님 생신, 외식하기엔 정성이 없어 보이고 직접 만들기엔 솜씨가 부족하다면 생신상 세트 키트가 있다. 돼지갈비찜, 모듬버섯잡채, 새우해물냉채, 소불고기낙지전골 등이 포함돼 있고 6~7인이 먹을 만큼의 양이 배달된다. 가격은 20만 원대(6인 기준).
유슬기│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