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정 감독. 한번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명 감독은 아니다. 데뷔작 <혈투>는 흥행에 있어서 고배를 마신 작품이다. 그럼에도 박 감독은 최민식, 황정민, 이정재라는 잘나가는 배우들을 불과 두번째 작품에서 한데 모았다. 이는 제작사와 투자자, 그리고 배우가 감독을 인정할 때에만 나올 수 있는 그림이다. 충무로가 박훈정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찌감치 충무로의 이야기꾼으로 인정받던 박 감독은 작심하고 만든 두 편의 시나리오로 김지운과 류승완 두 명의 감독을 매료시켰다.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 두 편의 영화를 한 해 동시에 개봉하며 저력을 과시한 것이다. 탁월한 감각으로 매혹적인 이야기를 선보였던 그가 연출에 대한 욕망을 뿜어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박희순·진구 등이 열연한 첫 작품 <혈투>는 흥행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사극과 플래시백이 결합한 새로운 장르를 선보인 <혈투>는 그의 잠재력을 확인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한정된 인물, 제한된 공간, 그리고 무섭게 돌진하는 스토리텔링. <혈투>는 그렇게 최소한의 요건으로 최대한의 완성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가 ‘작정하고’ 만든 <신세계>는 ‘감독 박훈정’의 능력을 오롯이 펼칠 수 있는 무대가 됐다.
<대부> 시리즈 100번 이상 보고 다양한 갱 영화 섭렵
주지하다시피 <신세계>는 조직폭력배를 중심으로 한 남자들의 의리와 배신, 암투의 비정한 세계를 그린 누아르다. 경찰과 폭력조직, 조직 간, 그리고 조직 내부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그렸다는 점에서 <대부> 시리즈와 <무간도>를 닮은 듯한 기시감(데쟈뷰)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고 했던가? <신세계>는 <대부> <무간도>의 스토리텔링을 변주해 한국식 누아르로 완성해냈다.
“<대부> 시리즈를 워낙 좋아하고 영향도 많이 받았다. 언젠가 한 번은 비슷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으니 내가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머릿속에서 스토리는 계속 굴러가고 있었을 것이다.”
박 감독 스스로도 <신세계>가 <대부> 시리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실제로 박 감독은 <대부> 시리즈를 100번 이상 봤을 정도로 광팬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처음 보고 수십 번 봤다. 대학교 가서도 수십 번 본 것 같고 군대 있을 때도 많이 봤다. 마피아들이 피비린내 나게 싸우고 대립하다가 함께 식사하는 정기적 모임을 갖는 게 흥미로웠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개인적인 원한은 원한, 그게 바로 정치 아닌가. 그런 장르는 우리나라에 없으니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신세계>를 질렀다.”
물론 <신세계>가 <대부> 시리즈에 빚을 지고는 있지만 오마주를 표방하며 온전히 기댄 작품은 아니다. 박훈정 감독은 <무간도> <도니 브래스코> <헬스 키친> 등 다양한 갱스터 영화를 섭렵하며 <신세계>의 토대를 다져왔다. 그리고 자신만의 문법으로 한국형 갱스터 영화의 탄생을 알렸다.
“<대부> 이후의 모든 갱스터 영화는 <대부>의 영향을 받았고, <무간도> 뒤에 나온 모든 홍콩 누아르는 <무간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나 역시 두 영화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 애초에 그 작품들을 뛰어넘겠다는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고, 그만한 자신도 없다. 다만 영향은 받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신세계>는 기업형 조직과 공권력의 소용돌이에서 밀려드는 비극을 통해 한국형 갱스터 영화의 가능성을 열었다.
<신세계>는 속편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고 끝난다. 이정재와 황정민, 두 사람의 회상 신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많은 질문이 가능하다. 이정재와 황정민의 우정은 어떻게 시작했는지, 과거에 경찰을 배신한 인물은 누구인지, 석 회장을 죽음으로 내몬 인물은 누구인지 등 프리퀄(Prequel: 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에 대한 궁금증을 남겨놓는다.
<신세계>를 유심히 관찰한 관객들은 눈치챘듯이 이 영화의 스토리텔링은 구조적으로 ‘중간’, 즉 몸통에 해당한다.
“속편 만들게 되면 인물 전사 다룰 생각”
“<신세계>는 명백히 인물의 개인사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난권력의 탄생에 대한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표면적으로는 강 과장(최민식)과 정청(황정민)을 비롯해 조직 안에서 정청과 아귀다툼을 벌이는 이중구(박성웅)까지 개인이 보이지만, 그들은 각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세력이 충돌하는 이야기이므로 개인적인 사연으로 빠질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사연은 전사(前史)에 있을 텐데 <신세계>는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이 진행된 상태에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애초에 생각했던 이야기의 딱 중간 부분인 셈이다. 기회가 되어 속편을 만들 수 있다면 인물의 전사를 다룰 생각이다.”
속편을 기대해도 좋다는 의미다. 구체적으로 더 들어가보자.
<신세계>는 1990년부터 2013년까지 23년간을 다룬 영화다. 강과장이 기획한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폭력배 정청과 언더커버로 그의 조직에 들어간 이자성(이정재)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강 과장이 원하던 대로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진다. 정청과 이자성은 여수를 통합하고 서울로 올라와 ‘북대문파’를 만든 뒤 석 회장(이경영) 조직과 충돌을 일으켜야 하는데, 여기서 정청이 물리적 충돌 없이 담판을 지어 석 회장 밑으로 들어가버린다. 정청을 만만하게 봤던 강 과장이 판단 오류를 일으킨 셈이고, 그렇게 두 조직이 합쳐져 골드문이 탄생한다.
“<신세계>는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의 이야기다. 전체 내용으로 보면 2부 격인데, 앞부분부터 이야기를 풀자니 관객의 부담이 상당할 것 같았다. 반면 지금 이야기는 대단히 장르적이고 쉬우니 먼저 선보이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세계>는 갱스터 영화의 자장 안에서 한국형 누아르의 탄생을 선언했다. 충무로의 기념비적인,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감독으로서 박훈정의 발견은 올해 충무로가 거둔 의미 있는 수확 중 하나다.
글·지용진(매거진 M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