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장승을 만든 것이 인연이 돼 대목수가 된 뒤 한민족 장승 연구를 하고 있는 김진식 씨가 자택 마당에서 장승을 만들다가 파안대소하고 있다.
눈이 많이 내리면 깊은 산속의 오래된 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다. 자연의 이치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제대로 걷지 못하고, 먹지 못하면 자리에 눕듯이 고목도 때가 되면 쓰러진다. 봄이 되면 목수들은 자연에 순응해 쓰러진 나무를 거두러 산에 오른다. 쓰러진 나무를 잘 만나는 것도 인연이다. 장승을 만들기 위해 목수들은 좋은 인연이 될 나무를 찾는다.
장승은 나무인데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생명이 있을 때도 땅에 뿌리를 박고 움직이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죽어서도 인간의 얼굴을 하지만 역시 움직이지 못한 채 땅에 박혀 있다. 땅에 박힌 나무는 밑동부터 썩는다. 그래서 장승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쓰러진다. 10년을 못 넘긴다. 쓰러진 장승을 대신할 장승을 다시 만들어 그 자리에 심는다. 장승은 그렇게 윤회한다. 쓰러지고, 다시 세워지고, 쓰러지고, 다시 세워지고…. 우리 조상은 장승을 살아 있는 인간 취급했다. 심지어 합방을 시켰다. 완성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한 쌍은 한동안 포개진다. 그리고 헤어져 각자 자리를 잡고 땅에 박힌다.
▶김진식 대목수의 연장. 한 제자가 손잡이에 가죽을 감아주었다고 한다.
민속학과 석사 마치고 박사과정 중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고개는 죽령(竹嶺)이다. 높이는 689m. 예부터 영남 지방과 호서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옛날 어느 도승이 이 고개가 너무 힘들어서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했다. 그 죽령의 고개에 장승이 여러 개 서 있다. 모두 한 사람이 만든 장승이다. 바로 김진식(51) 대목수다. 1991년부터 이 고개에 장승을 세웠다. 장승이 쓰러지면 새 장승을 세웠다. 장승의 표정은 다양하다. 가슴에 새긴 글자도 흔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아니다. ‘花香千里, 人德萬里’(화향천리 인덕만리: 꽃향기는 천 리를 가고, 인간의 덕은 만 리를 간다)라는 한자 시구를 새긴 장승도 있다.
그는 죽령장승보존협회 회장이다. 손이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될 만큼 큼직하다. 길게 자란 머리는 뒤로 묶었다. 턱수염도 길게 자랐다. 콧수염도 자리 잡았다. 입은 옷은 어떠한가? 흰 광목으로 만든 옷은 마치 조선시대에서 툭 튀어나온 모습이다. 말 그대로 조선시대 목수다. 그가 죽령에 세워진 장승들 사이에 섰다. 장승이 그이고, 그가 바로 장승 같다.
▶나무를 깎는 데 쓰는 큰 나무망치
장승은 조선시대 역참제도에 의해 국가에서 10리와 30리마다 만들어 세우고 관리하던 이정표였다. 장승의 가슴에는 자(自)~로 시작해서 현 위치와 인근 부락까지의 이정과 거리가 표현되어 있었다. 장승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던 ‘국장생, 황장생’ 등 사찰의 경계를 표시한 석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장승백이’란 이름도 이정표 장승이 서 있었던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장승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역참제도를 폐지하고 근대적 우편제도가 도입되면서 사라졌다.
김 대목수는 흔히 마을의 수호신으로 알려진 장승은 사실 ‘벅수’라고 설명한다. “장승이 사라지고 마을에 남은 벅수들을 민속학자들이 장승이라고 부르면서 장승과 벅수가 혼선을 빚기 시작합니다. 벅수는 장신, 액막이, 오방신장, 할아버지 등으로 불리며 고을 앞에서 지킴이의 역할을 하는 신장이었습니다. 현대의 장승은 관광지의 홍보나 안내 역할로 남아 있고, 벅수는 지금도 수백 곳의 마을에서 섬김의 대상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장승을 깎았다. 죽은 나무에 인간의 얼굴을 만들어 생명을 불어넣은 셈이다. 길거리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외롭게 서 있는 장승은 지역 간의 경계를 표시했고, 이정표 역할을 했다. 마을의 수호신 역할도 했다. 그는 장승에 관한 논문으로 안동대 민속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박사과정에 있다. 그리고 대목수로 장승도 직접 만드니 장승에 관한 한 전문가인 셈이다.
▶죽령 고개에 있는 장승들과 그 장승을 만든 김진식 씨
밑동은 천하대장군, 나머진 지하여장군
김 대목수는 오랫동안 전국의 장승을 찾아다녔고 장승을 만드는 과정을 살폈다. 그가 7년 전 직접 본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검복리의 장승 만드는 과정을 따라가보자. 이 마을에서는 2년마다 장승을 세우는데 우환이나 부정을 타면 건너뛴다. 장승을 만드는 이는 계곡물에 몸을 정결하게 씻는다. 그리고 장승을 만들 나무를 찾는다. 밑동 지름이 40㎝가 넘는 층층나무가 선택됐다. 마른 명태 한 마리와 막걸리 한 잔을 올리고 이장이 대표로 3번 절을 한다. 명태의 머리를 떼어서 나무 밑에 두고 전기톱으로 나무를 벴다. 잘린 나무는 길이를 맞춰 두 덩어리로 나뉘었다. 밑동은 천하대장군이 되고, 나머지는 지하여장군이 된다. 장정 7~8명이 나무를 산 밑 개울가로 옮겨 껍질을 벗긴다. 본격적인 장승 만들기 작업이 시작되니 마을 사람 20여 명이 모였다. 여자들은 숯불을 피워 삼겹살을 굽고 생태찌개를 끓이고 술과 안주를 준비했다. 마을 사람들은 술을 마셔가며 작업을 했다.
낫과 끌, 자귀를 이용해 껍질을 모두 벗긴 뒤 톱과 도끼로 몸체를 깎는다. 경험 많은 이가 얼굴을 만든다. 오래돼 썩어 넘어진 장승을 옆에 뉘어놓고 그대로 본뜬다. 눈을 그릴 때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둥그렇게 말아 헌 장승 눈에 대고 본을 뜬다. 장승 머리에 붙일 사모도 만들고, 귀도 따로 만든다. 전기 대패로 명문을 쓸 가슴 부분도 말끔히 다듬고 얼굴은 그라인더로 곱게 간다. 유성 매직펜으로 눈도 그린 뒤 두 장승을 겹쳐놓고 합방시켰다. 그리고 천하대장군은 길 어귀에, 지하여장군은 300여m 떨어진 숲길에 세웠다.
장승 세우는 일을 마치자 장승제를 지낸다. 이 마을 제사의 특징은 향을 피우지도, 축문을 읽지도 않는 것이다. 생두부를 8각형으로 모를 내서 올린다. 제사가 끝나면 소지를 올린다. 첫 번째는 동네 소지, 두 번째는 이장 소지, 세 번째는 제주 소지이고 연장자 순으로 올린다. 제주가 소지에 불을 붙이면 “올해 장사 잘되고, 건강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소원을 빈다. 이장은 불붙은 소지를 하늘 높이 올린다.
▶김진식 씨가 장승의 눈을 깎고 있다.
영국 셰필드대학에도 장승 세워
김 대목수는 임진왜란 때 왜병이 조선을 쉽게 함락한 이유 중 하나로 장승을 꼽았다. “장승의 가슴에는 애초 ‘천하대장군’의 글자가 새겨진 것이 아니라 이정표가 새겨져 있었어요. 근처 마을까지 거리가 정확히 새겨져 조선에 들어온 왜군들은 장승의 이정표를 보고 쉽게 진군할 수 있었지요.” 장승의 표정에는 공통점이 있다. 짙은 눈썹에 눈을 부라린다. 벌린 입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이 위협적이다. 머리에는 저승사자가 쓰는 모자를 쓴다. “임진왜란 후에는 백성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전염병이었어요. 특히 마마(천연두)가 공포의 대상이었지요. 그래서 무서운 얼굴을 한 장승이 전국에 자리 잡았어요.”
그는 어릴 때부터 미술 시간이 즐거웠고 찰흙으로 인형을 만드는 것이 좋았다. 영남대 조소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뒤 풍기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근무하다 3년 만에 그만두고, 대목수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연히 만난 서경원 대목수에게 목수 일을 가르쳐달라고 간청해 본격적인 대목수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의 삶에 장승이 자리 잡은 것은 대학 2학년 때다. 당시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대학가에 장승 세우기가 유행처럼 번졌다. 운동권이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영남대 교정에 세울 장승을 만드는 책임자가 됐다. 도서관에 가서 장승에 대한 자료를 모아 시계탑 앞에 ‘민족통일대장군’ ‘민주해방여장군’ 한 쌍의 장승을 만들어 설치했다. 나중에 대목수가 되고 죽령에 장승을 세워달라는 부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장승 연구에 들어갔다. 올해 3월에는 영국의 셰필드대학 교내에 장승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김진식 씨 자택 마당에 있는 소나무들과 장승들
십승지 첫손 꼽히는 곳에 직접 한옥 지어
그가 사는 곳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용천동이다. 학교를 떠난 뒤 자신이 살 곳을 찾아 헤맸다. 지도를 펴고 등고선을 살피다가 한 곳에 눈길이 멈췄다. 그곳은 <정감록>에 한반도 십승지의 첫 번째로 꼽힌 곳이다. 십승지는 전쟁이 나도 안전하고, 흉년이 들지 않고, 전염병이 돌지 않는 10곳이다. <정감록> 덕에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이곳에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전공한 음악가 아내를 만난 그는 용천동에 직접 한옥을 지었다. 그 한옥 마당에는 장승을 만드는 데 쓸 굵직한 통나무가 이미 만들어놓은 장승들과 어우러져 있다. 그는 소나무 긴 토막 하나를 옮겨놓고 장승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기톱으로 껍데기를 깎아내고, 장승 만들 때 쓰는 각종 연장이 꽂혀 있는 큰 가죽 주머니를 펼친다. 모두 자신의 손에 맞게 대장간에 주문해서 만든 장비들이다. 손잡이에 가죽이 덮여 있어 고급스럽다. 제자들이 만들어준 것이라고 자랑한다.
큼직한 나무망치로 여러 가지 끌과 정의 머리를 한동안 두드리자 어느새 장승의 얼굴이 새겨졌다. “애초 장승의 얼굴은 화려하지 않았어요. 희로애락의 표정을 모두 담은 우리 민족의 얼굴이었지요.” 한옥을 짓고 문화재 수리를 하며 장승을 옆에 두고 사는 그는 웃는 모습이 유난히 밝다. “우리 민족의 진솔한 표정을 장승에 담아내려고 합니다.”
글·사진 이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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