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와 다름없던 한국 테니스계는 2013년 7월 한 선수의 등장에 주목했다. 큰 키에 안경을 착용한 소년은 닉 키르기오스(호주)와 보르나 초리치(크로아티아) 등 당시 주니어 최강자로 군림하던 선수들을 차례로 제압하고 윔블던 주니어 남자 단식 대회 결승까지 진출했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주니어 대회에서 ‘테니스 변방’ 한국 선수의 승승장구는 이형택 이후 숨죽였던 테니스계를 흥분시켰다. 결승에서 지안루이치 퀸지(이탈리아)에게 2-0(5-7, 6-7)으로 패했지만,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며 테니스계에 확실히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그의 이름은 정현(21·한국체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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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4년 뒤 정현은 남자 프로 테니스(ATP) 투어 정상에 오르며 한국 테니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정현은 지난 11월 11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끝난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총상금 127만 5000달러) 대회 결승에서 안드레이 루블레프(37위·러시아)를 세트스코어 3-1로 꺾고 생애 첫 투어 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 대회는 21세 이하 선수 가운데 상위 랭커 8명이 출전해 실력을 겨루는 대회였다. 대회 전만 해도 정현의 우승을 예상한 이는 별로 없었다.
세계 랭킹 54위인 정현은 출전 선수 8명 가운데서도 5번째에 지나지 않았다. 아시아 선수로 유일하게 출전한 정현은 상위 랭커들을 잇달아 꺾고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출전 선수 가운데 세계 랭킹이 가장 높아 톱시드를 받은 루블레프를 조별리그와 결승전 두 차례서 만나 모두 이겼다. 한국 선수가 ATP 투어에서 우승한 건 지난 2003년 1월 이형택이 아디다스 인터내셔널에서 정상에 오른 이후 무려 14년 10개월 만이다. 21세 이하 톱랭커들이 겨룬 권위 있는 세계대회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포커페이스로 정상에 오른 정현을 두고 로이터 통신은 ‘아이스맨(ice man)’으로 칭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로 윔블던 주니어 남자 단식 준우승
정현은 테니스 집안의 막내다. 아버지 정석진 씨는 선수 출신으로 삼일공고 테니스부 감독을 지냈고, 형 정홍(24·현대해상)도 테니스 선수다. 어린 시절 고도 근시와 난시로 고생한 정현은 넓고 초록색인 것을 많이 보는 것이 시력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테니스를 시작했다. 체격 조건과 운동 신경이 남달랐던 정현은 라켓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두각을 드러냈다. 2008년 오렌지볼 12세부와 에디 허 인터내셔널 12세부에서 우승했고, 2011년 오렌지볼 16세부 정상에 올랐다. 모두 한국 선수 최초다. 2013년 메이저 대회인 윔블던 주니어 남자 단식에서 준우승을 하면서 한국 테니스계에 희망으로 떠올랐다. 메이저대회 주니어 단식 준우승은 정현이 역대 4번째, 윔블던에서 준우승한 것은 정현이 처음이다.
2014년부터 본격적인 ‘꽃길’을 걸었다. 시니어 대회인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세 차례 우승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8월엔 한국 테니스 선수 사상 최연소인 만 18세 3개월의 나이에 ATP 챌린저 투어 대회(방콕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인천아시안게임에 임용규와 조를 이뤄 복식에 나선 정현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테니스가 남자 복식 금메달을 딴 것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유진선·김봉수 이후 28년 만이었다.
2015년 4월 미국 챌린저 대회에서 우승컵도 들어 올린 정현은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로는 두 번째로 세계 랭킹 100위 안에 진입하는(88위) 역사를 썼다.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 사상 최연소인 만 18세 11개월의 나이에 이룬 대기록이었다. 세계 랭킹 100위권에 당당히 진입한 정현은 세계 최고 귄위를 자랑하는 US 오픈 테니스 대회 본선 자동 출전 기회도 얻었다.
2015년 US 오픈 대회 128강전(1회전)에서 제임스 덕워스에게 3-0(6-3, 6-1, 6-2) 완승을 거뒀고, 64강전(2회전)에선 세계 최강 스타니슬라스 바브린카(스위스)를 상대로 패하긴 했지만 주눅 들지 않고 명승부를 펼쳐 테니스 팬들을 놀라게 했다. 어느덧 세계 수준의 반열에 올라선 정현은 그해 7월 열린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단식 금메달을 따는 건 당연했다.
▶ 지난 11월 11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넥스트제너레이션 파이널스에서 우승한 정현 선수 ⓒ연합
숨 막히는 승부에서 강인한 정신력 발휘
브레이크 없는 질주에 제동이 걸린 건 2016년이었다. 호주와 프랑스 오픈에서 연이어 1회전 탈락하며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복부 근육 부상에 시달렸던 정현은 ‘입스(yips)’ 증세까지 호소하며 포어핸드 스트로크를 구사하는 데 애를 먹었다. ‘입스’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호흡이 빨라지고 손에 경련이 일어나는 등 불안해하는 증세다. 세계 랭킹도 100위권 밖으로 추락했고, 그를 둘러싼 여론의 목소리도 부정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정현은 이 시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이 없었다고 돌아본다. 슬럼프 기간 동안 근력을 키워나갔고, 안정적인 서브 자세를 연마해 서비스 위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다시 일어선 정현은 2017년 1월 호주 오픈에서 개인 통산 두 번째로 메이저대회 단식 본선 승리를 일구며 반등을 예고했다. 4월에는 ATP 투어 바르셀로나 오픈에서 당시 세계 랭킹 31위 필립 콜슈라이버, 21위 알렉산더 즈베레프(이상 독일)를 차례로 꺾고 8강에 올라 라파엘 나달(스페인)과 ‘꿈의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1주 뒤 ATP 투어 BMW 오픈 2회전에 당시 세계 랭킹 16위 가엘 몽피스(프랑스)를 꺾는 등 상승세를 이어가 개인 통산 처음으로 투어 대회 4강 진출에 성공했다. 여세를 몰아 정현은 시즌 두 번째 메이저대회인 프랑스 오픈에서 3회전까지 진출했다.
정현이 메이저대회 3회전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고, 한국 선수의 메이저대회 3회전 진출은 2007년 9월 US오픈에서 16강까지 오른 이형택 이후 9년 9개월 만이었다.
정현의 별명은 ‘교수님(The Professor)’이다. 늘 안경을 쓰고 있어서 해외 언론에서 이 같은 별명을 붙였다. 각종 대회 소개 자료에도 정현의 이름 앞에는 ‘교수님’이라는 별명이 따라붙는다. 경기 중 안경을 벗고 땀을 닦는 모습은 이제 정현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어린 시절부터 한국 테니스의 기대주였던 정현은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차세대 최강자로 우뚝 섰다. 정현은 이번 우승으로 세계 테니스를 이끌 차세대 주역 가운데 선두주자임을 확실히 입증했다. ‘교수님’이라는 별명은 단지 안경 때문만이 아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을뿐더러 숨 막히는 승부에서도 흔들림 없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루블레프와의 결승전이 이를 잘 보여줬다.
정현은 루블레프의 강서브에 눌려 첫 세트를 타이브레이크 끝에 내줬다. 2세트도 첫 서비스 게임을 브레이크 당하면서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정현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루블레프의 서브가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끈질긴 승부 끝에 2세트를 승리로 이끌었다. 루블레프는 서브가 말을 듣지 않자 라켓을 코트 바닥에 내팽개치는 등 여러 차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럴수록 정현은 더욱 침착하게 자신의 플레이를 이어갔다. 이미 기 싸움에서 제압한 루블레프를 상대로 3세트와 4세트를 잇따라 점수를 따내고 승리를 확정지었다.
정현은 우승을 확정짓고 나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벌려 감격적인 순간을 만끽했다. 정현은 귀국 인터뷰에서 “의미 있는 대회 우승으로 시즌을 마쳐 기쁘지만 올해 내 점수는 80점 정도다. 모든 면이 부족하다”며 “서브도 더 예리해져야 하고 정신력이나 체력도 마찬가지”라고 자세를 낮췄다. 그러면서 “메이저 대회 우승과 같은 큰 그림은 아직 이르지만 조금씩 그려나가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2017년 톱랭커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자신감을 회복한 정현은 마침내 ATP 정상까지 정복하며 한국 테니스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세계 남자 테니스의 차세대 스타로 우뚝 섰다. 한국 선수 최고 세계 랭킹은 여전히 이형택이 2007년 8월 기록한 36위다. 메이저대회 최고 성적 또한 이형택의 2007년 US 오픈 16강이다. 정현의 개인 최고 세계 랭킹은 올해 9월 44위, 메이저대회 최고 성적은 올해 프랑스 오픈 3회전 진출이다. 하지만 만 21세의 나이에 정점을 찍은 정현이 ‘전설’을 뛰어넘는 건 시간문제다.
성환희 | 한국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