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임하룡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인민군 하사관 장영희 역을 연기했다. ⓒ임하룡
요즘 나는 손녀딸 재롱에 숨넘어가는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분장을 하고선 “젊은 오빠라고 불러”라며 코미디 무대에 선 게 엊그제 같은데 진짜 할아버지가 됐다. 그만한 시간이 흘렀음은 내가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았다는 사실로도 새삼 깨닫게 된다. 지난 40년 동안 개그맨으로서 그리고 배우로서 참 많은 순간을 마주했다. 두 역할이 주는 각각의 매력에 흠뻑 젖었던 모든 순간이 생생하다. 그중에서도 배우 인생의 기억은 조금 더 각별하다.
1978년 라디오 방송을 통해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따지고 보면 1976년 극단 ‘가교’에서 연극배우로 무대에 오른 것이 진짜 데뷔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난 연기자가 되고 싶어 숱한 탤런트 시험을 봤지만 낙방하기 일쑤였고 어려운 형편 탓에 연극만 계속할 수 없었다. 당장 돈벌이가 가능한 야간업소 사회자로 취직해 무명 밴드를 소개하는 일을 하게 됐다. 지금의 난 거기서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알게 된 전유성·김학래 선배의 소개로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고 1981년 KBS 특채 개그맨으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러 캐릭터를 소화했다. 훈장 선생님, 깡패 두목이 되기도, 젊은 할아버지가 되기도 했다. 특히 책가방을 끼고 빨간 양말을 신은 채 다이아몬드 춤을 추는 날라리 고등학생은 개그맨으로서 나를 상징하는 캐릭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중고등학교 시절 철없이 놀기만 했는데 그 경험을 콩트로 만들어 코미디로 보여주게 되다니 어찌나 감회가 새롭던지. 마치 자서전 같은 코미디였다. 덕분에 1989년 KBS 코미디 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1991년에도 코미디 대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 개그를 시작한 방송사에서 대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는 데 크게 감격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었다. 2000년도에 접어들면서 코미디 프로그램이 거의 사라졌다. 그때는 방송사 숫자도 지금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에 개그맨으로서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다 못해 없었다. 자연스럽게 연기자 생활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다른 분야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우리가 여행 중 장소를 옮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오히려 과거 외면해야만 했던 꿈을 다시 꿀 수 있게 된 것이 행복했다. 코미디는 빠르게 바위를 뒤집어 물고기를 잡는 민물낚시라면 연기는 장시간 기다리다 낚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평창 인근 농장에서 촬영했는데 눈이 60cm씩 내려 만들어둔 촬영장이 밤새 사라질 때도 있었다. 또 내가 맡은 배역은 비행기에서 투하되는 포탄을 맞고 죽는 바람에 굉장히 짙은 연기 속에서 긴장했었다. 그래도 좋았다. 연기하는 재미는 당연하고 이 영화로 제26회 청룡영화상(2005년) 남우조연상을 수상해 배우로 인정받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로 크고 작은 배역으로 다수 영화에 출연했고 나만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하지만 배우가 됐다고 해서 개그를 향한 갈증이 없어진 건 아니다. 얼마 전부터 지방 공연을 계획 중인 이유다. 언젠가 내 과거 코미디에 연기적 요소를 더해 악극, 뮤지컬 형태로 보여주려 한다. 나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 ‘젊은 오빠’처럼 항상 도전하는 젊은 오빠로 남고 싶다.
임하룡│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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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