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먹었냐고 인사말을 건네는 만치 누군가의 건강을 염려할 때 사람들은 흔히 ‘링거 한 대 맞아’라고 한다. 그만큼 일반인들에게 링거는 친숙하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아니라도 심한 감기몸살이나 과로로 고생할 때 병원에 가서 링거 한 병 맞으면 한결 나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원에 직접 가야 하고, 날카로운 주삿바늘에 대한 두려움에다 만만찮은 가격 탓에 자주 맞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링거는 150년 전 영국 의사 시드니 링거가 개발한 수액으로, 주사를 통한 투여 방법은 개발 당시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제 병원에 가서 링거를 주사로 맞는 150여 년간의 방식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주사 대신 ‘마시는’ 링거가 개발됐기 때문이다. 이 획기적인 개발의 주역은 바로 특전사 군의관 이원철(33) 대위다. 이원철 대위가 개발한 ‘링티’는 마시는 링거, 말 그대로 경구 수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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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임관 후 구체화된 ‘마시는 링거’ 연구
이원철 대위는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 2016년 2월 특전사 군의관으로 임관했는데 훈련 중 탈진하는 병사들을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돌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마시는 수액 개발에 들어갔다. 이원철 대위가 개발한 마시는 수액 ‘링티’는 가루 분말을 물 500ml에 섞어 마시면 수액 주사를 맞은 것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일명 ‘링거워터 프로젝트’라 불리는 이 개발은 2017년 6월 국방 스타트업 챌린지에서 1등으로 육군참모총장상을 받았다. 도전! K-스타트업에서는 국방부장관상을 받았다. 제품 출시 전 아이디어를 공개하고 투자금을 받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와디즈에서 1억 6000만 원을 투자 받아 2018년 1월부터 소비자 판매를 시작했다.
정맥을 통해 곧바로 주사한 수액은 신체 곳곳으로 퍼진다. 수액 1L를 넣으면 한두 시간 뒤 혈관 속에 275ml가 남는데, 275ml만큼 혈액이 늘어난 것이다. 링티도 같은 효과를 가질까.
“정맥주사 효과와 가장 근접하게 만드는 게 목표였어요.입으로 먹게 되면 장에서 흡수가 돼 간을 거쳐 혈관까지 가는 데 많은 손실이 있죠. 그래서 정맥으로 맞는 것 아니냐고 해요. 하지만 저는 흡수율을 높이고 소변으로 소실되는 양을 잘 조절해서 최대한 근접하게 만든다면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활의학과 출신인 이원철 대위는 임관하기 전부터 마시는 링거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수액 치료의 효과 유무에 관해 의사들의 의견은 반반이다. 이 대위는 효과가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재활의학과를 전공하면서 효과가 있다고 확신하게 됐다.
“파킨슨병, 척수 손상 환자분들의 경우 저혈압 쇼크가 자주 옵니다. 기립성저혈압이라고 해서 누운 자세로 앉거나 앉은 자세로 일어설 때 혈압이 떨어지고 정신을 잃는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전날 항생제 치료 때문에 수액을 맞은 환자들이 다음 날 문제가 덜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혈압이 떨어지는 문제도 덜하고 재활치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더라고요.”
큰 대학병원이었음에도 재활의학과 의사인 이원철 대위에겐 주사로 투여하는 방식은 문제가 됐다. 매일 재활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들이 그 전날 매번 수액을 맞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이원철 대위는 마시는 방식의 수액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관련 자료를 조사하는 등 생각을 구체화시켰다. 하지만 부서가 바뀌면서 마시는 링거에 대한 연구는 유야무야됐다. 그러다 군의관으로 임관하면서 다시금 마시는 링거에 대한 연구는 탄력을 받게 됐다. 임관을 하고 보니 군에서는 민간보다 수액을 더 많이 쓰고 있었던 것.
수액 치료는 군의관만이 할 수 있는 처치다. 수액 세트는 수액 1L, 주삿바늘, 고정 도구, 드레싱 재료 등 무게가 약 1.2kg 정도다. 속옷도 버리고 칫솔 손잡이까지 잘라내 짐의 무게를 줄이는 훈련 상황에서 채비하기엔 상당한 무게다. 이런 환경을 접하다 보니 수액을 마실 수 있게 만든다면 활용하기 좋겠다, 군의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열사병 및 탈진 환자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레지던트 시절 막연히 마시는 링거가 있으면 좋겠다던 생각이 다시금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원철 대위의 생각을 들은 군의관 훈련소 동기 몇몇이 연구에 합세해 구체적인 개발에 들어갔다.
“이라크전 데이터를 보면 사망자 3000명 중 90%가 과다출혈입니다. 과다출혈은 지혈이 중요하고 그다음은 수액 투여입니다. 미군도 경구 수액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연구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시도가 어디서 멈췄는지 알게 됐고, 한국화된 제품이 있었으면 좋겠단 열망은 더 강해졌죠.”
마시는 수액을 개발하면서 직접 음용 후 군의관들끼리 서로 혈액검사도 하면서 개발을 이어갔다. 수액의 효과는 이미 입증됐기 때문에 실험 결과가 좋을 건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수없이 주삿바늘에 찔리는 일상이 계속됐다. 당시 혈액 채취 기억은 여전히 가장 힘든 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개발의 복병은 의외로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맛이었다.
이원철 대위는 왜 미군에서 비슷한 시도가 있었으나 활용되지 못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경구 수액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는 보급품도 너무 맛이 없었는데, 이원철 대위가 개발한 마시는 링거의 최종 완성 분말도 물에 타 마시면 맛이 없었다. 이원철 대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맛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고.
‘마시는 링거’라는 콘셉트에 집중하다
“아무리 약이라지만 처음 형태는 억지로도 먹지 못하겠더라고요. 이게 극복이 잘 안 됐어요. 맛을 위해 성분 구성을 변경할 수도 없고, 그걸 유지하면서 맛을 만드는 게 정말 지난한 과정이었습니다. 그게 내부적으로 심각해서 그만 접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어요. 아, 이게 이래서 제품화가 안 됐던 거구나 하는 순간까지 갔어요.”
군인 신분인 이원철 대위를 대신해 당시 마시는 링거 제품 상용화를 위한 민간인 팀이 전국의 음료 회사와 전문가들을 만나 해결책을 찾았다. 상용화된 링티는 인도네시아 레몬 껍질에서 추출한 향을 쓴다. 같은 성분이라도 어느 회사의 원료이냐에 따라 구역질이 나기도 하고 설사를 하는 등의 부작용이 있을 정도로 ‘완성된 레시피’를 찾는 과정은 어렵다. 이원철 대위도 7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200번이 넘는 레시피를 시도한 끝에 수액 주사와 비슷한 효과를 유지하면서 음료처럼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는 맛을 가진 제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원철 대위는 ‘맛있게 만들었을 때’를 개발 과정 중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꼽는다. 세상 밖으로 나간 링티의 반응은 뜨겁다. 특히 현장에서 마시며 큰 도움을 받았다는 소방관의 후기가 이원철 대위에게 가장 인상 깊다. 전역 후엔 의사가 아닌 창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약은 공급자인 병원과 제약회사 중심으로 개발됐는데요. 현장에 있으면 ‘이게 왜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제품이 많습니다. 의사인 전문가로서 ‘소비자 중심의 약’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이 링티 개발의 시작이 되었고요. 의사가 사업을 한다면 이런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대위는 링티가 군대나 소방서 등에 모두 보급될 수 있도록 보다 양질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또 신부전으로 인한 사망률 1위인 동물들에게도 공급할 수 있는 확대된 제품을 만들고 싶은 계획도 있다. 링티 개발은 의사로서 병원 밖에서 찾은 보람된 길 중 하나가 됐다.
강은진│위클리 공감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