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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온 산하에 눈이 쌓이고 설이 다가오면 마을은 공연히 들떠 올랐다. 그러면 아이들과 강아지들까지 덩달아 분주해졌다. 아이들이야 물론 설을 차리기 위해 바쁜 것은 아니었고, 연을 만들거나 대보름날 저녁 쥐불놀이에 쓸 빈 깡통 등을 찾기 위함이었다.
연을 날리려면 차령 이북의 중부지방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비닐우산을 찾아야 했다. 비닐우산이라고 해야 요즘처럼 플라스틱 우산대에 두꺼운 비닐이 깔끔하게 입혀진 것이 아니라 대나무 우산살에 얇고 파란 비닐을 실로 꿰매 고정시킨 정도였다.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연을 만드는 데 웬 비닐우산을 찾느냐 하면, 바로 이 대나무로 만든 우산살 때문이었다. 중부 이북 지방에서는 대나무가 자라지 않아 그마저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대나무 우산살을 찾으면 우선 이것을 가늘고 곧게 다듬어 엮고 한지를 바른 다음 색을 칠하고 무명실을 구해 묶으면 근사한 연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다음은 연줄에 사기 가루를 먹이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기를 잘게 빻아 풀에 섞어 연줄에 입히는 일이다. 연줄을 감는 ‘얼레’야 그림에서 보듯 그렇게 멋진 것은 아니어서 대충 나뭇가지나 송판을 잘라 감으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정성을 들여 직접 만든 연을 소중히 가슴에 안고 대문을 나서던 기분이란….
그러나 그 흔한 우산살마저 구하지 못할 때는 싸릿가지에 도화지를 붙여 만든 연을 들고 나가기도 해 보지만, 이 경우 십중팔구는 자꾸 팽이처럼 빙빙 돌다가 땅으로만 처박히기 일쑤인데 그 황당함은 아이의 마음을 여지없이 후벼파게 마련이다.
“푸른 창공에 두둥실 멋지게 연이 날아오르면 그 넓은 하늘이 마치 나만의 공간처럼 느껴져 가슴속이 무엇인가로 꽉 차는 느낌이었죠. 지금도 연을 날리다 보면 어릴 때의 바로 그 기분에 빠져 나이를 잊고는 합니다.”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양평민속연보존회 부회장 이창석(63) 씨. 어릴 때부터 연 날리기를 각별히 좋아했다는 그는 1994년 근무하던 한국통신이 민영화되면서 회사 홍보 도구로 연을 이용해 주목받았다가 퇴직 후에는 아예 전통연을 만들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의 기억으로는 연 날리기를 아무리 좋아해도 정월 대보름날 달집태우기를 끝내고 연을 날려 보내면 더이상 연을 날리지 못했는데, 그 이후에는 농사에 전념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요즘에는 연의 모습도 용이니 솔개니 하며 온갖 형태가 다 등장하고, 그 재료도 얇은 비닐부터 비단까지 동원되지만 이씨는 우리나라 전통 연은 흔히 민속연으로 불리는 방패연과 세 개의 고리를 단 가오리연 단 두 가지뿐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즈음의 행태를 비난할 일은 못된다. 모든 방면에서 ‘우리 것이 세계로 통한다’던 시대를 넘어 우리부터 외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야말로 세계와 어울리는 자세라고 일컫는 시대이니 말이다. [SET_IMAGE]4,original,center[/SET_IMAGE][RIGHT]사진 권태균/ 글 이항복[/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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