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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 많았으니 이제 나쁜 일이 생기겠죠. 인생이 그렇지 않나요?”
지난 9월11일 제61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빈집>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김기덕(44) 감독. 지난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사마리아>로 감독상을 수상한 지 불과 7개월 만이다. 한 감독이 같은 해 두 번이나 세계 3대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거머쥔 것은 세계 영화사에서도 찾기 힘든 사례다. 세계 3대 영화제가 경쟁부문에 같은 영화를 초청하지 않는 데다 한 감독이 몇 달 만에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1996년 데뷔 이후 8년간 무려 11편의 영화를 찍은 김 감독이나 세울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 며칠 전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그는 담담한 표정이다.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서 제가 갑자기 성장한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상을 받았다고 호들갑떠는 분위기가 더 이상한 거죠.”
그는 지난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을 때만 해도 ‘이변’이라고 헐뜯던 사람들이 상을 하나 더 추가하자 이제서야 인정해 주려는 분위기가 못내 섭섭하다.
‘충무로의 이단아’로 불리는 김기덕 감독. 그는 영화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정식으로 영화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초등학교 졸업 후 친구들이 중학교에 진학할 때 그는 농업전수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그러나 그나마 졸업하지 못하고, 해병대에 입대하기 전까지 공장 10여 군데를 떠돌아다녔다.
“4년6개월 뒤 다시 사회로 나왔을 때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전처럼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1990년 그는 무작정 ‘그림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떠났다. 프랑스에서는 학력에 구애받지 않고 그림만 잘 그리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영화라는 매체를 처음 접한 것도 프랑스에서였다.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귀국했지만 그에게 영화판은 녹록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인맥으로 연결된 연출부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연출부 생활을 네 번 정도 해봤는데, 개봉까지 간 작품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4년처럼 치열하게 했죠.”
그는 연출부 막내로 일하면서 감독이 어떻게 한 컷 한 컷을 찍는지 치밀하게 관찰했다. 그러나 충무로 판에서도 나이 서른에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100m 앞에 떨어져 있는 빵조각도 보입니다. 바로 제가 그랬습니다.”
[B]“내가 살아온 인생에 감사한다”[/B]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너무 영화를 하고 싶었던 그는 ‘자기방식’대로 영화를 찍기로 했다. 그가 찾은 그만의 방법은 철저한 ‘저예산 영화’를 만드는 것. 1994년 시나리오 학원에 다니며 쓴 <화가와 사형수>로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그는 1996년 주류 질서 바깥으로 밀려난 밑바닥 삶을 다룬 <악어>로 감독에 데뷔했다. 그가 <악어>를 찍기 위해 쓴 총 제작비는 3억 원. 당시 평균 영화 제작비는 15억 원이었다.
그 뒤 그는 <야생동물보호구역>(1997) <파란대문>(1998) <섬>(1999) <수취인불명>(2001) <실제상황>(2000) <나쁜남자>(2001) <해안선>(2003)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등을 전부 제작비 10억 원 미만으로 찍었다. <빈집>도 제작비 10억 원으로 단 16일간 찍은 영화다.
젊은 시절 폐차장 등 공장 10여 곳을 전전하며 배운 기술이 영화 촬영장에서 요긴하게 쓰인다는 김 감독. 그는 영화를 찍는 기술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보는 시선과 의식이라고 말한다. 지난 베니스영화제 시상식에서 밝힌 “내가 살아온 인생에 감사한다”는 수상 소감은 그의 이런 생각을 담은 말이다.
제도권의 틀 밖에 서 있는 그에게 야박한 평가를 내렸던 국내 비평가들에 비해 국외 비평가들은 일찍부터 그의 영화에 훨씬 후한 점수를 줬다. 상반된 삶을 사는 창녀와 여대생이라는 두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 <파란대문>이 베를린·모스크바·카를로비 등 세계 20여 개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국제적 주목을 받기 시작한 김 감독은 2000년 <섬>, 2001년 <수취인불명>이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2002년 <나쁜 남자>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진출하는 등 지금까지 5차례나 3대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됐던 것이다. 이는 그가 영화 경력을 이어가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됐다.
“제 영화 중 지금까지 국내 관객 100만 명을 넘긴 영화는 한 편도 없습니다. <나쁜남자>가 70만 명인데, 그것은 순전히 주연배우였던 조재현을 보러 온 관객들이었고요. 나머지 영화는 전부 1만 명 미만이에요. 어떻게 보면 저는 국내에서는 아직도 시장에 안착하지 못한 감독 중 하나라고 봐야죠.”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제도권에서 한 발 비켜선 자신에 대한 편견과 싸워 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는 김기덕. 하지만 그는 이제 “과거 내가 받았던 오해, 열등감, 불행을 비관하던 시간이 <빈집> <사마리아> 같은 영화의 동력이 됐다”고 말할 만큼 여유를 찾았다.
그는 “한국에서보다 외국에서 자신의 영화가 더 인기를 끄는 것이 아쉽다”며 “이번 수상이 한국에서도 오해와 불신을 걷고 좀더 이해와 공감을 나누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는 또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도 아쉽지만, 반대로 상을 받았다고 해서 실제보다 더 높이 평가받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면서 “외국에서 영화에 투자하겠다는 투자가가 있지만, 앞으로도 저예산 영화를 계속 찍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제 영화는 작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작은 영화라고 해서 큰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력과 인맥의 벽으로 둘러싸인 한국사회에서 철저히 비주류였고, 영화 역시 밑바닥 인생들이 등장하는 비주류 영화를 만들어 왔던 김기덕 감독. 비록 우리는 그를 주류라고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세계 무대에서 당당히 주류가 되어 돌아왔다. 그를 편견 없이 온전히 평가하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남은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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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