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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보석’으로 꼽히는 옥은 우리에게는 선사시대 유적지에서도 출토될 만큼 역사가 길고도 깊다. 조선시대에는 패옥·가락지·비녀·단추 등 남녀 장신구로 사랑받았으며, 벼루·주전자 등 생활공예품의 재료로도 쓰였다. 그러나 우리 조상의 화려한 전통 옥공예술은 문화재로만 남았을 뿐 그 공법은 시간 속에 갇히고 말았다. 배고픈 장인의 길을 잇고자 하는 이들이 드문 탓이다.
중요무형문화재 100호 옥장(玉匠) 장주원(張周元.67) 옹은 옛 문헌을 뒤져가며 단절되다시피 한 전통 옥공예술을 복원한 주인공이다. 고희를 바라보는 장씨가 옥공예를 시작한 것은 서른 즈음. 선친께서 금은방을 운영하셨던 터라 보석공예는 그에게 낯설지 않은 분야였다.
1962년 종로 금은방에 들어가 금은세공을 익힌 그는 곧 뛰어난 손재주로 종로통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의 뛰어난 손재주는 종로통에 자리잡은 뒤 금세 소문이 났다.
“내 고향이 목포여서 종로통에서 까다로운 세공 제품 수리가 들어오면 아예 ‘목포장한테 가져가 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인정받았제.”
[B]종로에서 금은세공품 수리하다 옥공예에 빠져[/B]
금은세공품을 수리하던 재미에 푹 빠져 살던 어느 날, 그에게 깨진 중국 옥향로 수리가 들어왔다. 보석 세공에서는 ‘한국 최고’를 자부하던 그였지만 옥향로만큼은 문외한이었다. 요리조리 아무리 뜯어봐도 수리할 방도가 없었다.
“물어물어 향로를 수리하는데 묘한 매력이 느껴지더군. 그날 이후 옥공예에 흠뻑 빠져들었지.”
다이아몬드·사파이어 등 서양 보석은 빛을 받아야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지만 옥은 원석 자체의 아름다움이 있다.
“옥은 정적인 아름다움이야.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 더구나 원석의 결이 질겨 어떤 섬세한 조각도 가능하니 정말 도전해 볼 생각이 들었지. 옥이라는 게 보석 세공사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재료거든.”
옥공예에 인생을 걸겠다고 결심한 뒤 그는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그에게 옥공예를 가르쳐줄 만한 이를 찾는 것은 무망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혼자 공방에 틀어박혀 옛 문헌을 뒤지기 시작했다. 독학으로 옥공예를 터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중국 옥공예를 벤치마킹하러 대만의 고궁박물관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한번 영감이 떠오르면 공방에 틀어박혀 몇 달이고 옥만 쪼아댔지. 7개월 동안 대문 밖을 안 나설 정도로 몰두했던 시절도 있어.”
그는 작품에 몰입하면 잠자는 일도 잊어버릴 정도로 이 천업에 빠져들었다. 잠은 작업중에 5분씩, 10분씩 자는 쪽잠으로 해결할 때도 있었다. 시간이 아까워 밥도 한 끼만 먹었고, 생리 해결도 공방에서 했을 정도였다. 이런 그를 보고 주변에서는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
“2층 공방에서 옥을 쪼고 있으면 아랫방에서 하는 식구들 소리가 다 들려. 하루는 집사람이 친구와 통화하는데, 정신병원에 데려가야 할 정도라고 하더라니까!”
실제로 그는 1979년께 정신병원에서 세 달 동안 요양을 하기도 했단다.
[B]23년째 3톤짜리 ‘코리안판타지’ 제작중[/B]
옥공예와 인연을 맺은 지 20년쯤 지났을까. 마침내 옥공예에서 일가를 이뤘다고 자부하던 그는 다시 대만의 고궁미술관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 중국인 안내원이 사슬 모양의 옥 목걸이를 가리키며 “이 작품은 중국 민족만이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장씨는 또 오기를 발동했다. 그리고는 2년 뒤 그는 똑같은 모양의 옥 목걸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8년 뒤에는 오목거리의 사슬과 사슬을 금 대신 옥으로 연결하는 ‘신기술’을 개발해 중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2년 전에 내가 만든 옥 목걸이를 목에 걸고 그곳을 다시 찾아갔어. 안내원이 내 목걸이를 쳐다보더니 어디서 났느냐고 묻더라고. 한국에서 샀다면서, 한국에는 아주 흔하다고 대답했지. 내가 만들었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때, 그 기분은 정말 좋더군.”
그는 현재 내년 봄 완성을 목표로 <오대양육대주>라는 작품을 제작중이다. 높이 70cm, 폭 55cm의 대형 향로다. 그가 계획하는 다음 작품은 <코리안판타지>와 <500나한도>. <코리안판타지>는 3t짜리 옥석에 단군 이래 한국의 역사를 담아내는 작품으로, 그는 현재 23년째 작업중이다. <500나한도> 역시 20년 전부터 구상한 작품으로, 분야별 최고 전문가 500명을 조각할 계획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작품들을 완성한다면 옥공예 종주국을 아예 한국으로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이 장주원이 혼자 13억 명의 중국을 이긴 것 아닌가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일본 NHK 방송국에서 초대전을 제의해올 만큼 옥공예에서 일가를 이룬 장주원 옹. 그는 21세기의 장인정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선 조건이 없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을 사랑해야 하고. 나는 남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일을 즐겨 왔지. 옥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남들이 1등이라고 평가를 해주더군. 그래서 나도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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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