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2,original,center[/SET_IMAGE]
[SET_IMAGE]3,original,center[/SET_IMAGE]
세상의 온갖 잡사를 잊겠다고 잠시 산사에 의탁했다고는 하나, 본격적으로 속세를 벗어나지 못한 몸으로는 모든 수행이 다 어설플 뿐이다. 자신을 깨우라는 목탁 소리에 오히려 못다한 인연이 떠오르고, 애써 버리려던 욕심마저 풍경소리에 다시 피어오른다.
마주 대한 순백의 벽면은 갖가지 색으로 가득하고, 돌아앉아 명상에 들면 그 끝에는 수마와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그때마다 내리치는 ‘죽비’에 잠시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영원히 사는 고승의 부도를 마주하고 그 말씀에 기대거나 진심을 실어 백팔배를 해도 사라지지 않는 욕심, 사심, 번뇌, 온갖 인연들….
사심을 쓸어내듯 절집 마당을 쓸며 ‘울력’에 집중하거나 산길을 걷는 ‘포행’에 진력해도 마음은 쉬 잡히지 않는다. 하기야 절집에서 행하는 무엇 하나 수행 아닌 것이 있으랴만 행여 육신을 고되게 함으로써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기대해서다.
그러나 그조차 쓸데없는 욕심일 뿐. 어차피 속세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욕심이나 인연을 버린다는 것은 애당초 가당찮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단지 산과 계곡물을 벗삼아 사나흘 마음을 확 풀었다 다시 죄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제격이지 않을까? 그도 아니면 육신과 정신을 내쳐 산바람에 맡기고 절밥으로 지친 육신이나 달래볼 밖에.
[SET_IMAGE]4,original,center[/SET_IMAGE]
산사 체험은 단순한 포교의 수단이 아니라 삶에 지친 도시인들에게 주어진 색다른 휴식의 기회다.
마냥 늘어지거나 휴식을 위해 또 다른 지친 시간을 보내야 하는 휴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깨어 있는 휴식의 기회다. 그러다 보니 연령의 구분도 없고 인종의 구별도 없다. 나아가 예수님을 그리든 부처님을 그리든, 그 어떤 종교와도 상관이 없다. 오로지 나에서 벗어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일 뿐이다.
혹 그러면 어쩌다 한 순간 마음의 끝자락에서 목탁소리가 계곡의 작은 폭포에 물 떨어지는 소리로 들리고, 풍경소리가 아니라 사실은 바람소리로 들릴 때, 눈 깜빡할 찰나지만 육체는 천길 땅 속으로 꺼져들고 마음은 장천 구만리를 난다.[RIGHT]사진·권태균 / 글·이항복[/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