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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회. 서울 공릉동 주양교회 표세철(44) 담임목사의 헌혈 기록이다. 26년 동안의 기록이니 어림잡아 1년에 10번씩은 꼬박꼬박 헌혈했다는 얘기다. 보통 국민이 평생 한두 번 헌혈하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그는 열여섯 살 때 첫 헌혈을 했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1977년 고교 1학년 때 헌혈 버스가 지나기에 그냥 올라탔습니다. 헌혈을 통해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헌혈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목사였고, 저 역시 기독교인이었으나 그 전까지는 헌혈은 물론 이웃사랑을 실천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요즘 헌혈과 장기 기증 등 ‘온몸을 다 바쳐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소문난 목회자다. 그는 지난 6월11일 ‘세계 헌혈자의 날’에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았다.
첫 헌혈 이후 표 목사는 요즘도 보름에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헌혈을 계속하고 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규칙적으로 헌혈을 하니 가족들이 달가워할 리 없다.
특히 표 목사의 어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잘 먹고 잘사는 것도 아닌데 몸이라도 건강해야 한다”며 헌혈을 극구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신념을 지킨다는 면에서 남달리 고집이 센 표 목사는 이런 반대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30분 정도면 끝나는 ‘일반 헌혈(혈장성분 헌혈)’에 그치지 않고 ‘혈소판 헌혈(백혈병 환자를 위한 헌혈)’까지 주기적으로 하고 있다. 혈소판 헌혈은 헌혈 시간만 80분 이상 걸리며, 헌혈한 뒤에도 메스꺼움과 현기증이 있어 일정시간 안정이 필요할 만큼 고역이다.
[B]아들과 딸까지 정기 헌혈자로 만들어[/B]
표 목사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헌혈을 권유해 정기 헌혈자로 만들었다. 현재 대학교 2학년인 큰딸을 자신이 첫 헌혈을 시작한 만 16세가 되던 해 헌혈 센터로 데려갔다. 아버지의 권유로 헌혈에 처음 참여한 딸은 이후 자발적으로 현재까지 모두 여섯 번의 헌혈을 했다. 현재 고2인 아들도 만 16세가 되던 지난해 생일에 아버지와 함께 첫 헌혈을 했다. 아들의 헌혈 기록은 2회.
그러나 표 목사의 이웃사랑은 헌혈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신장과 간까지 이웃과 나누었다.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1991년 2월. 신문에서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대표인 박진탁 목사의 글을 읽고 난 뒤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등줄기에 찌르르 전류가 흐르는”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그의 나이 31세였고, 당시 그는 목사가 아니라 생명보험회사 영업사원이었다.
젊은 나이에 자기 몸의 일부를 남에게 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마음에 사무치는 결심이 있었을 법하다. 그는 당시 자신의 생활을 이렇게 반성했다고 한다.
‘먹고살기 위해 하루하루를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뛰어다니느라 이웃은 물론 자신에게도 불성실하지 않았는가? 목사였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교회와 먼 생활을 해 오지는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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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는 1988년 겨울에 앓았던 결핵성 늑막염, 1989년 여름에 당한 교통사고 등 두 번의 ‘죽을 고비’가 새삼 떠오르더라고 말했다. ‘살아 있을 때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자’고 결심한 그는 그 길로 박진탁 목사를 찾아가 시신·신장 기증서를 내놓았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가족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1988년 결핵성 늑막염을 앓고 난 뒤여서 아내는 “당신이 참 못 말릴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해도 너무한다. 우리 처지에 몸이라도 성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울먹였단다.
당시 그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특별히 배운 것도 없고, 보험영업이 대체로 그렇지만 수입도 들쑥날쑥이었다. 월급으로는 치솟는 전세금을 마련하기에도 빠듯한 상태였다. 가족을 건사하려면 오로지 자신의 몸뚱이 하나를 밑천 삼아 뛰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는 “아프면 남을 돕고 싶어도 못 돕는다. 어차피 신체검사를 해서 이상 없는 사람만 기증할 수 있다. 끝까지 반대한다면 이혼하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 완강하게 나오자 아내는 마지못해 동의하더라고 말했다.
그의 신장을 받은 이는 부산에 사는 고교 2학년 여학생. 만성신부전증을 앓던 이 학생은 1주일에 2∼3회 투석을 해야 할 정도로 증상이 심해 학교까지 중퇴한 상태였다. 그 여학생은 가족 중에도 신장 이식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는 몸이 약했고, 어머니는 혈액형이 딸과 달랐다. 표 목사가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하자 이 여학생의 어머니는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신장 하나를 제3자를 위해 기증했단다. 눈물겨운 모성애였고, 사랑의 릴레이였다. 신장을 제공받은 이 여학생은 이후 완쾌해 공부를 계속했고, 표 목사는 이 여학생의 고교 졸업식에도 참석했다. 표 목사는 신장에 이어 2002년 10월21일 간의 60%를 기증했다.
[B]이웃사랑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B]
표 목사에게 체질화된 이런 이타심은 삶 전체가 신앙이자 사랑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표 목사는 “남들이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선행’ 이면에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심이 깔려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1961년 전남 광양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아버지의 3남3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1980년 간질환으로 작고할 때까지 그의 부친이 늘 가난한 개척교회만을 찾았던 탓에 표 목사는 초등학교를 여섯 번, 중학교를 두 번이나 옮겨다녀야 했단다. 그는 잦은 이사와 가난이 끔찍했고, 아버지의 목회 일도 싫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등진 뒤 가족들은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 또한 봉급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해병대 하사관이 되었다. 자연히 신앙생활과도 멀어졌다. 그러던 그가 자신이 근무하던 군부대 내 교회에서 어느 군목의 설교를 듣고 아버지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힘들고 가난한 길을 기꺼이 걸었던 시골 개척교회 목사 아버지가 가슴 저리도록 그리워졌다. 그때 그는 간절한 기도를 하고, 그토록 싫어했던 교회 곁으로 되돌아 왔다.
사랑의 전도사 표 목사에게는 아버지가 몸으로 보여준 사랑의 실천과 자기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RIGHT]최영재 기자[/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