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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장애인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필요합니다. 늦게 공부하려는 장애인을 위한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모두사랑장애인야간학교(www.modoosarang.or.kr)’의 오용균(59) 교장은 장애인에 대한 복지정책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사각지대가 남아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오 교장은 공군 중령 출신이다. 이제 그에게는 ‘중령님’이라는 호칭보다 ‘교장 선생님’이라는 직함이 더 자연스럽다. 탄탄대로일 것만 같던 그의 삶은 1992년 뇌수막종 수술을 받으면서 완전히 뒤바뀌었다.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지체장애 1급 장애인이 된 것.
군 복무 시절, 그는 남보다 근무 성적이 두세 걸음 앞선데다 고위급 장성의 의전장교를 전담해 대령 진급 ‘ 0순위’로 꼽혔다. 야망과 의욕에 불타 청춘을 군에 쏟아부었지만 병마로 뜻하지 않게 옷을 벗게 됐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미련이 없다. 전역 뒤 세운 모두사랑장애인야간학교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55명의 장애인 학생과 53명의 교사가 있다. 한때 500여 명의 부대원을 거느리던 장교였지만 지금 그가 학교에 쏟는 열정과 노력은 그때와 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재활치료를 받던 당시, 국가유공자 신분으로 꼬박꼬박 연금을 챙기는 자신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오 교장은 그때를 회상했다.
“군 복무 시절 부대원들에게 항상 ‘인내와 사랑’을 강조했던 것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가슴에 꽂히더군요.”
그래서 1994년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들과 함께 ‘한빛다사랑나눔회’를 만들었다. 명절 때마다 혼자 사는 장애인을 찾아가 외로움을 함께 나누고, 형편이 어려운 장애인 학생들에게 적지만 장학금도 주는 모임이었다. 그렇게 한 7년쯤 봉사를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장애인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교육’이라는 사실이었다.
오 교장은 “누구보다 건강하다가 장애인이 되니 그들의 고통을 하나둘씩 몸으로 느끼게 됐고, 평생 이들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었다”며 “당시 글을 배우지 못한 일부 청장년층 장애인의 마음속에 배우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랬다. 돌아보니 그가 만난 많은 장애인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집안 망신’이라는 생각에 부모조차 장애인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를 망설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기 힘들어 결국 사회와 멀어지고 의사소통 역시 끊어지는 악순환으로 장애인의 좌절감은 깊어만 가는 형편이었다.
[B]장애인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에 ‘감사’[/B]
그것이 오 교장으로 하여금 다른 활동을 접고 장애인 야학을 열게 한 계기가 됐다. 학연·지연은 물론 심지어 군 시절 상급자 등 아는 인맥을 모두 동원해 학교를 세울 자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2001년 6월 모두사랑장애인야간학교의 문을 열었다.
처음 야학이 들어선 곳은 대전시 둔산동의 한 상가 건물. 그러나 학생을 모으기도 전에 문을 닫아야 했다. “장사하는 데 방해된다”는 입주자들의 항의 때문이었다. 분노가 치밀고 억울한 생각이 앞섰지만 발 빠르게 장소를 물색해 새로 얻은 곳이 대전시 월평동의 45평짜리 사무실이었다. 둔산동 상가에서 쫓겨난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오 교장은 대전교육청 인터넷사이트 등을 통해 학생과 교사를 모집했다. 개교 당시 22명의 학생과 교사 24명, 17명의 차량봉사자가 모였다. 모두사랑장애인야간학교의 작지만 큰 ‘첫발’이었다.
[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이 학교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두 명의 검정고시 수석과 대학 입학자 네 명을 냈다. 오 교장은 “모두 야학 교사들의 헌신적 노력 덕분”이라며 공을 돌린다. 그의 말대로 야학 선생님들의 열정과 사랑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현직 교사와 대전외국어고 자원봉사 학생으로 구성된 선생님들은 검정고시 일정이 잡히면 시험 한 달 전부터 ‘비상체제’에 들어간다. 야학이 끝난 후에도 보충수업을 하고, 수업이 없는 주말에도 학생의 집까지 찾아가 1대1 과외지도를 하는 열정을 보여 주었다.
이런 교사들의 정성을 바탕으로 야학이 자리 잡는가 싶더니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믿고 계약했던 학교 건물이 부도난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사실 그동안 임대료가 2배 이상 오른 터여서 당장 적당한 장소를 찾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나마 있던 보증금도 월세를 못내 다 까먹은 상황이었죠.”
좌절하고 주저앉은 그를 이번에는 장애인 학생들이 일으켜 세웠다. 어려운 사정을 들은 학생들이 스스로 ‘야학 살리기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며칠인가 지나 그들이 가져온 봉투에는 액수는 많지 않지만 학생들의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학생들의 형편을 잘 아는 오 교장은 받아든 봉투 위에 참았던 눈물을 흘렸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오 교장은 교사들과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학교를 살려내자”고 의견을 모았다. 야학 교사들이 십시일반 500만 원을 만들었다. 오 교장도 한 푼이라도 보태 줄 지역 인사들을 만나러 손이 부르트도록 휠체어 바퀴를 굴렸다. 그들의 안타까운 사정이 지역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순식간에 도움의 손길이 밀려들었다. 종교단체·기업체 등에서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주변의 도움 덕분에 오 교장은 2004년 1월 대전 둔산 신도시에 새로 학교를 열었다. 이전 학교보다 2배 반 정도 더 넓은 공간. 건물주도 야학에 호의적인데다 장애인이 불편을 덜 수 있는 경사로·엘리베이터 등 편의시설도 비교적 잘 갖춰져 대만족이었다. 학생·교사도 개교 당시보다 배로 늘었다. 그간의 시련이 말 그대로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이런 노력과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왔던 오 교장. 최근 들어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온다는 그는 “사실 고비는 넘겼지만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부쩍 자주 찾아오는 경련과 고통 탓에 이를 악무는 일도 더욱 늘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오 교장은 결코 야학을 그만둘 수 없단다. 이유를 묻자 그는 ‘애프터 서비스’ 때문이라고 했다.
“제 손으로 사회로 내보내고 또 결혼시킨 장애인 학생들을 계속 보살펴야지요.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실제로 그는 졸업한 이들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자신이 결혼시킨 장애인 부부의 대소사도 직접 챙긴다.
오 교장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찾아온 ‘장애’를 감사하게 생각한다. 신체적 불편은 어쩔 수 없지만 장애를 통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됐고, 장애인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갖게 된 것이 그 이유라고 했다.[RIGHT]백창훈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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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