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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의 경계를 넘어선 코미디언 김미화(40).
데뷔 22년을 맞은 그는 요즘 코미디와 결별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만큼 다른 일에
더 바쁘다. 2003년 가을 코미디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시사 프로그램 MBC
표준FM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진행을 맡을 때부터 화제가 됐다.
김씨는 지난 5월 KBS 1TV <TV, 책을 말하다>의 MC도 맡았다. 뿐만 아니다.
홍보대사·운영위원·기획위원 등 그가 일정한 역할을 맡고 있는 각종
단체의 행사에 참석하다 보면 스케줄 노트의 한 달 일정은 금방 빼곡히 채워진다.
“요즘 각종 비정부기구(NGO) 단체들의 행사가 많아요. 평일 저녁에는 라디오
진행하고, 주말에는 각종 행사에 참석하다 보면 일주일이 금세 가죠.”
유니세프한국위원회·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녹색연합·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그가 참여하는 단체 이름은 끝이 없다. 이름이 알려진 단체보다 그렇지 않은 단체가
더 많다.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요청이 오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모두
도와준다는 원칙을 스스로 세운 탓이다.
그렇다고 그를 각종 행사에 얼굴만 달랑 내미는 ‘홍보대사 전문 연예인’쯤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제대로 남을 돕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늦깎이로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 지난 2월 정확히 4년 만에 졸업했다. 방송활동 때문에
휴학할까 몇 번씩 고민하다가도 이를 악물었단다.
누구보다 잘나가는 코미디언인 동시에 한 명의 시민운동가이자 사회봉사자로 우뚝
선, 그래서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로도 불리는 김미화 씨를 지난 7월7일 오후 문화방송국에서
만났다. 녹화장에서 바로 나왔다는 그는 “시사 프로그램을 맡은 이후 제게 딱딱한
질문을 많이 하는데, 너무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말아 달라”며 농담으로 가볍게 말문을
열었다.
직접 스케줄을 관리하십니까? 매니저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없어요.
한 번도 안 뒀던 것은 아니고, 예전에 <쓰리랑 부부>를 할 때는 CF도 많이
하고 해서 관리 차원에서 뒀었죠. 코미디언은 스스로 코미디 연기를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매니저가 꼭 필요하지는 않아요. 로드 매니저 정도는 있으면 편하겠죠. 하지만
저는 오랜 세월 혼자 일하는 것이 버릇이 돼 혼자가 더 편하네요. 유명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디지털보다 아날로그적인 것, 사람 냄새 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방송국
측이나 PD와 이야기할 때도 직접 부닥치는 것이 낫고요. 또 봉사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 각종 단체에서 전화가 자주 옵니다. 직접 통화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해요. 거절당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제
목소리로 제가 직접 못하겠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제3자를 통해 전달받는 것보다 낫잖겠어요?”
말씀하신 대로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연예인으로 유명하십니다. 몇 군데나
참여하시나요?
“솔직히 모르겠네요. 한 50~60군데 되려나…. 요청이 들어왔을
때 제 여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려고 하거든요. 시간이 안 맞으면 못 도와드리지만
마음만은 다 도와드리고 싶어요.”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봉사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제가
어렸을 때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고 컸어요. 그때 커서 인기인이 되면 불우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어린 마음에 다짐했죠. 그 다짐을 하나 둘씩 지금 실천하는
셈이죠. 제 양심을 두고 맹세했던 다짐을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일을
하면서도 즐겁고요. 사실 여러 행사나 단체에 가서 제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기껏
어른들 손 잡아드리고, 아이들 손 잡아주는 것밖에 없어요. 오히려 그런 곳에서 제가
얻고 오는 것이 더 많죠.”
데뷔 22년차라서 묻기는 좀 어색합니다만, 어려서부터 꿈이 코미디언이었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랬습니까?
“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어려서부터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어요. 서영춘·배삼룡 씨가 제 우상이었죠. 학교 갔다
집에 오면 가방 던져놓고 코미디 프로그램 보는 재미로 살았죠. 어머니 말씀이 저는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대요.”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개그 콘서트>를 직접 기획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기획하게 된 것인가요?
“방송국에서 신인 코미디언을
뽑기는 많이 뽑는데, 이들이 막바로 무대에 서지는 못하거든요. 방송국에서 커피
심부름이나 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죠. 또 당시 한국 코미디는 저질이라는
말이 많았어요. 그래서 후배들을 통해 코미디의 ‘붐 업’을 일으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죠. 신인들의 연기 연습은 제가 2~3개월 맡아 시키면 되니까요. 정작
방송국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신인들만의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이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크니까요. 일단 저비용 고효율 구조의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무대 세트를 없애고 조명으로만 가자고 제안했죠. 또 관객을 동원하자는 것도 제
아이디어였고요. 당시만 해도 PD들조차 관객을 불러 코미디 프로그램을 찍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누가 코미디를 보러 오겠느냐는 반응이었죠. 마음 맞는
PD와 후배들을 모아 연습부터 시작했죠. 결국 <개그 콘서트>로 인해 많은 신인
코미디언이 주목받게 됐고, 코미디도 신선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죠. 또 가수 공연장처럼
피켓 들고 코미디 공연장을 찾는 팬이 생겨났고요.”
<개그 콘서트>의 성공을 예상하셨나요?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죠.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개그 콘서트>를 보신 분들이 한결같이
신선하다고 하시는데, 사실 예전에 선배 코미디언들이 했던 프로그램인 <꽁트꽁트>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당시 했던 개그를 시의성 있게, 또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게
약간 각색한 것뿐입니다. 인터넷이 많이 도움이 됐죠.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요즘
젊은 사람들이 어떤 유머를 좋아하는지, 어떤 CF나 영화에 열광하는지 등을 빨리
알아낼 수 있거든요. 이런 것을 바탕으로 아이디어회의를 하죠. 소프트웨어만 바뀌었지
하드웨어는 예전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그 틀을 사각형에서 육각형으로
약간 바꿨더니 새로워졌다고 하는 것이죠.”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나요?
“여러 군데서 얻죠. 큰 모티프는
책에서 많이 찾아요. 또 연기자는 보고 듣는 작업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후배들과 영화나 연극 구경도 많이 다닙니다. 코미디는 어렵게 머리를 짜낸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거든요. 모든 것을 재미있게 보고 또 예리하게
관찰하는 것이 관건인 것 같아요.”
코미디언 출신으로는 남녀를 통틀어 최초로 시사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맡게 되셨나요?
“PD가 저를 눈여겨보셨대요. 생각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시사 프로그램을 하자고 해서 처음에는 믿지 않았죠. 대략 한 달
정도 피해 다녔어요. 그런데 그 PD가 집까지 찾아와 시사 프로그램 진행을 맡는 것이
사회적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설득하시는 데 넘어갔죠.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따뜻한 뉴스를 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자고 했거든요. 요즘 뉴스는 많은데 대부분
험악한 내용들이잖아요? 사람들이 그런 뉴스만 접하다 보니 마음이 더 각박해지는
분위기이지 않습니까? 따뜻한 뉴스를 더 많이 접한다면 세상이 조금은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죠. 그렇다면 직접 봉사활동을 뛰는 것과 라디오를 통해 따뜻한
뉴스를 전하는 것이 방법은 다르지만 본질은 똑같다는 생각에 하겠다고 했죠.”
벌써 2년째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삶에도 조금이나마 변화가
있겠지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요. 다만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대중연예인인데,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부터 저를 뉴스 앵커처럼 보시는 분들이 계세요. 민감한
정치 이슈에 대해 물어보신다든지, 아니면 제가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등이죠. 대중연예인은 말 그대로 대중의 인기를 얻는 직업이기
때문에 ‘안티팬’이 있을 필요가 없거든요. 그런데 시사 프로그램을 맡고부터 제가
하는 발언에 대해 이해관계에 따라 호불호가 뚜렷이 나뉘는 것이죠. 저는 중간자적
입장에서 말한다고 하기는 하는데, 그 점이 힘들어요.”
[SET_IMAGE]4,original,left[/SET_IMAGE]호주제 폐지 홍보대사 활동 등 비교적
사회적 이슈에 직접 나서는 몇 안 되는 연예인 중 한 명이신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점이 있을 때 힘을 보태기 위해서죠. 호주제 문제는 저도
아이 엄마 입장에서 나섰던 것이고요. 저는 관심이 있는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보다
찬성이면 찬성, 반대면 반대라고 의견표현을 확실히 해야 세상이 밝아진다고 생각해요.
또 저처럼 알려진 사람은 더욱 그래야 하고요. 연예인 중 이런 일에 나서려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이런 일에 나섰을 때 무슨 꼼수나 있는 것처럼 바라보는 사회 시선
탓도 커요. 저만 해도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하니 혹시
나중에 정치를 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시면
더 많은 연예인이 봉사활동이나 사회활동에 나설 텐데, 그 점이 안타깝죠.”
지난 5월부터 <TV, 책을 말하다>를 진행하십니다. 원래 책을 많이 읽으셨나요?
“원래는
한 달에 한 권 정도 읽었어요. 많이는 못 읽었죠. 요즘은 1주일에 3~4권씩 ‘타의’로
읽습니다. 좋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네요.”(웃음)
22년째 현역으로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열심히
하는 것이죠. 또 하나는 사람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고요. 저는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무엇이든 정말 잘 해낸다, 책임을 다한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후배들도 연기는 조금 못할 수 있어요. 연기력은 기를 살려주면
금방 늘거든요. 그러나 인간성이나 신의, 이런 것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아요.
이런 것을 소중히 여기면 나중에 다 그런 진심이 통하게 되더라고요.”
평소에 오프라 윈프리를 닮고 싶다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점을
닮고 싶으신 겁니까?
“방송인으로 열심히 활동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돕는 모습입니다. 남들로부터 존경받기 어려운 요즘 시대에 오프라 윈프리는 ‘존경받는
여성’ 몇 사람 안에 꼽히거든요. 그러려면 가짜로 인생을 살면 안 돼요.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해야 하고, 어려운 일에도 적극 나서야 하죠.”
앞으로 맡고 싶은 프로그램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제가 원래
계획 있게 사는 편은 아니에요.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충실한 것이 전부죠. 코미디
연기는 평생 하고 싶어요. 지금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도 결국 코미디 연기를
더 잘하기 위해서입니다. 더욱 좋은 코미디 연기를 선보이기 위해 초석을 다지고
있다고 봐 주시면 고맙죠.”
오효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