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2,original,center[/SET_IMAGE]
정자는 결코 홀로 아름다움을 뽐내지 않는다. 간혹 궁궐의 정자처럼 단청을 하고 기둥과 창방에 낙양을 둘러붙여 자못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것도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부분의 전통 정자는 옛 선비들처럼 단아하면서도 기개를 잃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섰을 뿐 결코 자신을 내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자신의 모습을 닮은 정자를 특별히 좋아했고, 또 자신의 정신적 이상을 담은 정자를 스스로 짓기도 했다.
[SET_IMAGE]3,original,center[/SET_IMAGE]
이처럼 단순하고 고졸한 정자이지만 주위의 자연과 어울리면 그 어떤 건축물보다 고아하고 뛰어난 운치를 발한다. 아름다운 자연 한쪽 구석에 드러낼 듯 말 듯 수줍게 서서 한 점 인공을 더해 화룡점정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닌 느끼는 아름다움, 형이상학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수사마저 어쩌면 애써 달을 외면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데 익숙한 인간의 헛된 시각일지 모른다. 정작 정자가 올곧이 보여주려는 것은 고졸한 자신의 아름다움도, 고귀한 형이상학의 아름다움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그 자연의 섭리와 그 자연에 순응하는 우리네 삶을 드러내주는 상징물일 뿐이다.
[SET_IMAGE]4,original,center[/SET_IMAGE]
그래서인지 고려 중기의 학자 이규보는 정자를 ‘사방이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정자는 자신의 속을 다 비우고 그 자리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담아 보여주는 것이다. 아니, 정자는 차라리 비울 것도 담을 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무형의 모습이고 싶어할 듯하다. 그러니 정자를 보고 아름답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차라리 조용히 누마루에 올라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운행을 즐길 일이다.
요즘 새로 지어지는 웬만한 도심의 아파트 단지 한쪽에는 예외 없이 정자가 서 있다. 깨끗하게 정비한 실개천가에도 어김없이 정자가 들어선다. 먼 데 정자를 찾기 전에 먼저 집 근처 정자에라도 앉아 보자. 그마저 없다면 한적한 시골길 옆 초라한 원두막에라도 올라 에어컨 바람 대신 싱그러운 자연의 숨결을 느껴보자. 그것이야말로 정자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는 첫걸음일 게다.
[RIGHT]사진·권태균 / 글·이항복[/RIGHT]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