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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목표는 대한해협을 다시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올 여름으로 제가 대한해협을 건넌 지 꼭 25년 됐거든요. 그러던 것이 지난 봄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울릉도~독도 횡단으로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5년만 젊었어도 저 혼자 건넜을 텐데, 이제 연료통이 작아져서….”(웃음)
지난 8월12일 성웅(24)·성모(20) 두 아들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 사이 바닷길 92km를 18시간 걸려 수영으로 건너 화제가 되고 있는 조오련(53) 씨.
조씨는 1970년 제6회 방콕아시안게임에 출전해 2관왕을 차지하면서 혜성처럼 떠올라 한국 수영계의 기린아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아시아 수영계는 일본선수들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국내 관계자들도 기껏해야 동메달 정도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조씨가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리며 기염을 토하자 온 국민은 열광했다. 이후 조씨는 1978년 제8회 방콕아시안게임 동메달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한국 신기록을 무려 50여 차례나 경신했다. ‘아시아의 물개’라는 별명도 그래서 붙었다. 그는 한국인의 기상을 드높이기 위해 25년 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대한해협 48㎞를 혼자 수영으로 건넜다.
“이번 여름 대한해협에 다시 도전하려고 지난 2월부터 혼자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독도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주위 사람들이 독도를 헤엄쳐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했어요. 특히 두 아들과 함께 건너면 혼자 대한해협을 건너는 것보다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집요한(?) 설득에 설복당했죠.”
울릉도∼독도 횡단으로 방향을 바꾼 조씨는 두 아들에게 제안했고, 두 아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조씨는 둘째아들인 국가대표 수영선수 성모 군과 함께 곧장 제주도에서 훈련에 들어갔다. 해군 특수전(UDT) 부대에 복무 중이던 큰아들 성웅 군도 제대한 바로 다음날(6월24일)부터 훈련에 합류했다.
울릉도 앞바다는 오호츠크해 한류와 쿠로시오 난류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곳은 8월10일을 기점으로 난류에서 한류로 물의 흐름이 바뀐다. 따라서 어느 지점에서 한류인 냉수대를 만나느냐가 이번 횡단 성공의 관건이었다. 바다수영의 베테랑인 조씨도 “냉수대를 만나면 뒷골이 뻐근해지면서 버티는 데 정신력의 한계가 온다”고 말한다.
“심장 주위 온도가 35도 이하로 내려가면 근육의 움직임이 멈춥니다. 이것은 정신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생리적 반응이죠.”
조씨는 독도 부근에서 냉수대를 만날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대비해 조씨는 애초에는 ‘성모 8시간-성웅 4시간-조씨 8시간’의 릴레이 계획을 짰다. 아들들이 낮에 조금이라도 편하게 수영했으면 하는 아버지로서의 배려였다. 그러나 1m 앞에서조차 흐르는 물이 한류인지 난류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바다였다. 예상 외로 성모 군이 울릉도 도동항을 떠나자마자 냉수대를 만났던 것이다.
아들들을 배려하려던 조씨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성모가 괜찮다고 버텼지만 더 이상 수영하다가는 위험한 상황이 올 것 같아 4시간 만에그만두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다음 주자로 나선 성웅 씨는 몸이 덜 풀려 2시간밖에 버티지 못했다. 남은 구간은 온전히 조씨의 몫이 됐다.
“6시간이 넘게 수영하는 동안 육체적으로는 힘들지 않았어요. 오로지 내가 수영을 끝내고 나갔을 때 남은 구간을 아이들이 잘 버텨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죠.”
다행히 조씨가 나온 뒤 성모 군이 2시간을, 성웅 군이 3시간을 잘 버티어 줬다. 마지막 1㎞를 남긴 지점부터는 3부자가 함께 독도로 향했다.
[B]“물과 하나 되면서 투명해진 나 자신을 만났다”[/B]
전남 해남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조씨. 우연히 수영경기를 구경하면서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해남고 1학년을 자퇴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촌놈이 시골 탈출 방법으로 수영을 시작했습니다. 수영선수를 하면 서울에서 학교에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그러다 태극마크를 달게 되자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선수생활을 했고…, 대한해협을 건넜던 것은 사실 객기였어요. 1970년대 초에 신문에서 일본 수영선수 한 명이 대한해협을 건너다 10km를 남기고 부산 앞바다에서 배탈이 나 포기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수영선수를 은퇴하고 고려대 사학과에 다니고 있을 때 갑자기 그 기사 생각이 났습니다. 이왕이면 나도 역사를 하나 쓰자는 생각이 들었죠.”
1980년 대한해협 횡단, 1982년 도버해협 횡단, 2003년 한강 700리 종주 등 끊임없는 새 도전을 통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신기록을 만들어 가는 조씨. 그는 “늘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는 것은 같아 보이는데, 그것이 끝나고 나면 나도 모르게 변해 있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수많은 도전 중에서 그는 자신의 수영 인생을 바꿔 놓은 결정적 계기로 한강 700리 종주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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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700리 종주도 처음에는 객기로 시작했어요. 3년 전 중국사람이 잠실에서 한강을 건넜다는 기사를 봤는데, 무엇인가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왜 우리 강에서 중국사람이 설치나’ 뭐 이런 생각이었죠. 그래서 중국사람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기 위해 양쯔강 종주 계획을 짜며 그 예행연습으로 한강 700리 종주를 기획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강 700리 종주를 하면서 처음으로 물과 친구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물속에 들어가면 말도 못하고 들리지도 않습니다. 수경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방향을 잡는 정도이고 사실상 앞을 못 보는 것과 마찬가지죠.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죠. 그 상태에서 무아지경에 이르게 되면 물과 하나가 되면서 수영을 해도 힘이 하나도 안 드는 상태가 됩니다.”
그는 “물을 이기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며 “물을 연인 안듯 살포시 마음으로 안으면 물이 사람을 받아준다”고 말한다.
“수영할 때 물이 튀는 사람은 몸에 힘이 들어가서입니다. 성웅이와 성모만 해도 수영을 하고 나면 힘들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직 물과 친구가 안 됐다는 얘기죠.”
연초에 대한해협 횡단을 계획했을 때는 다시 한 번 물속에서 ‘투명해진 자신을 만나는 것’이 목표였다는 조씨. 비록 대한해협 횡단을 통해 풀고자 했던 갈증을 풀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울릉도~독도 횡단으로 계획을 수정하며 대신 국민의 염원을 실현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했다.
그는 또 “아이들에게도 물과 친구가 되는 법을 가르치고 싶었다”며 “성모가 냉수대를 극복한 것과 수영선수도 아닌 성웅이가 무릎 관절에 핀을 4개나 박고도 고된 훈련을 견뎌 준 것이 무엇보다 자랑스럽다”고 덧붙였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대동강 종주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조씨. 그러나 그는 “물에서 나왔으니 이제 다시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RIGHT]오효림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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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