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2,original,center[/SET_IMAGE]
“내가 열심히 살면 장애우들에게 희망이 되지 않을까요? 최소한 기쁨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5년 만에 장애를 극복하고 휠체어댄스를 선보이며 팬들 앞으로 돌아온 가수 강원래(37) 씨의 말이다. 2000년 11월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로 강씨는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됐다. 화려한 춤꾼이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됐으니 다들 그의 가수로서의 생명이 끝난 줄 알았다. 1996년 <쿵따리 샤바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한 사나이의 인생은 수직하강 국면에 접어드는 듯했다.
상식대로라면 그가 ‘클론’의 이름으로 무대에 선다는 것은, 다시 춤을 춘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하반신 장애인이 된 강씨에게 춤을 추지 못하게 된 서글픔 따위는 한낱 사치였다. 당장 대소변을 스스로 해결하는 일이 더 급했다. “언제 다시 무대에 설 것이냐”는 질문 공세는 그에게 남의 이야기를 묻는 것으로만 들렸다.
다행히 강원래는 불굴의 의지로 남보다 빨리 장애를 극복해 나갔다. 사고 후 1년쯤 지나자 혼자 대소변을 가리고 휠체어를 탈 수 있게 됐다. 라면도 끓여 먹을 수 있었다. 그때야 비로소 다른 장애우들이 생각하듯 ‘장애는 남들보다 조금 불편한 무엇’ 정도로 여기게 된 것이다.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생각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꿈틀댔다.
[B]말기 암환자 통해 삶의 의지 얻어[/B]
“사고 후 가요계 복귀는 꿈도 꾸지 못했어요. 오로지 대소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걱정뿐이었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사고를 당한 뒤 겪었을 그의 고통과 번민은 타인의 입장에서는 감히 가늠하기 어렵다. 오히려 시간이 흐른 지금, 참담했던 당시를 담담히 고백하는 그의 모습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그 시절 여러 차례 자해를 시도하고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런 힘든 시절을 의연하게 이겨내고 이제 그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당당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런 강원래의 모습은 늘 함께 있는 아내 김송 씨뿐 아니라 장애를 겪는 다른 이들에게도 큰 힘이 되고 있다.
그가 장애를 이겨내기로 마음을 바꾼 것은 병상에 누워 있을 때였다. 스스로 힘겨웠던 그때, 한 말기 암환자를 만난 덕분이었다.
“사고를 당하고 나서 너무 힘들어 자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한 말기 암환자를 만났죠. ‘<꿍따리 샤바라>를 들으며 힘을 냈는데, 정작 강원래 씨가 힘들어하면 안 돼요.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다시 한번 그 노래를 불러 힘이 되어주세요’라고 하더군요.”
그날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이름 모를 그 환자의 염려가 고마웠고, 또 죽음을 앞둔 그에게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분 같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려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아니었거든요. 단지 노래가 좋고 인기를 얻으려고 불렀던 것뿐인데…. 그 후 제가 사람들에게 때로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세상을 향해 새 눈을 뜨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 변화를 위해서라도 방송에 적극적으로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다부지게 먹었습니다.”
하지만 장애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에게도 어려움이 없을 리 없었다.
“세상을 향해 뛰쳐나오고 싶었지만 사고 후에는 우선 방송이 잘 안 불러주더라고요. 매년 4월20일 ‘장애인의 날’에만 서태지를 능가할 만큼 스케줄이 꽉꽉 차는 식이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배려나 제도적 보호장치가 아직 미흡해요. 우리나라 장애인의 90%가 질병과 교통사고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인데도 전문 재활병원은 전국적으로 4~5곳에 불과합니다. 장애인 전용 화장실이나 지하철 리프트도 턱없이 부족하죠. 힘들어도 장애인들 스스로 집 밖으로 나와 이동권 문제가 왜 중요한지, 무엇이 필요한지 말해야 합니다.”
이제 당당히 세상 밖으로 뛰어나온 그는 지난 3월 ‘명예 보호관찰관’으로 위촉됐다. 이에 따라 강씨는 지난 4월 수원보호관찰소를 시작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전국 보호관찰소를 순회하며 강연을 하고 있다. 연간 2만5,000명에 달하는 교통법규 사범과 5만여 명의 비행 청소년이 주대상이다. 강씨가 명예 보호관찰관으로 위촉된 것은 하반신 마비라는 장애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경험을 통해 한때의 과오로 보호관찰을 받는 청소년들의 재활 의지를 높이기 위한 것.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사고 덕분에 더 유명해졌다”는 강씨는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지만 장애인들을 만나 고충을 함께 나누며 재활 의지를 다지다 보니 지금은 오히려 이곳저곳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또 “이번에 보호관찰관이 돼서 어깨가 무겁다”며 “그들이 나를 통해 재활의 희망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덧붙였다.
강씨는 명예 보호관찰관이 되기 전인 지난 2월 이미 천안보호관찰소에서 오토바이 절도, 무면허 운전 등으로 보호관찰을 받고 있던 청소년 70여 명에게 교통법규 준수의 중요성 등에 대해 강의를 했다. “강의를 시작할 때는 마땅치 않은 반응이었지만 사고 당시의 이야기를 생생히 들려주며 교통사고의 위험성이나 청소년기 생활의 중요성 등에 대해 이야기하자 비로소 반응이 오더라”는 강씨는 “강의를 마친 후 서너 명으로부터 고맙다는 이메일을 받았는데 나름대로 감명 깊었던 것 같다”고 소회했다.
[B]“휠체어댄스로 장애우에 꿈과 희망 줄 것”[/B]
“댄스가수 강원래가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자극이 될 것입니다. 교통사범 재범 방지는 물론 한때의 잘못을 후회하고 있을 청소년들에게 재활 의지를 키워줄 수 있도록 앞으로도 열심히 강의하겠습니다.”
강원래의 몸은 사고 이후 살짝 충격만 받아도 중심을 잃을 정도로 허약해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의 표현대로라면 ‘많이 뻔뻔해졌다.’ 휠체어를 탄 몸이라고 더 이상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히 휠체어댄스를 통해 장애우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다.
그는 “휠체어 덕분에 밖에 나갈 수 있었고, 다시 대중 앞에 설 수 있었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휠체어를 탄 사람을 보면 재수 없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휠체어를 타고 멋지게 춤을 추면 그런 거부감도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멋진 춤을 춘다는 것이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역시 춤 연습을 하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이나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계속하느라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돼야 했다.
“장애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장애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시선을 깨달았습니다. 제 친구 구준엽도 클론의 이름으로 남들보다 조금 앞서서, 조금 큰 목소리로 노래하자는 데 동의했죠. 그래서 이렇게 세상 밖으로 당당히 나왔습니다. 장애인의 대표선수 격으로 말이죠. 그런 제 모습이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에게 때로는 교과서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RIGHT]백창훈 기자[/RIGHT]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