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2,original,center[/SET_IMAGE]
“아들로서 아버지께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고영광(69) 씨는 아버지인 <송 오브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이
광복 60년 기념일에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서 공식 서훈받은 데 대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그의 한국 방문은 2002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그의 이번 방한은 선친을
대신해 대한민국 훈장을 받으러 온 것이기에 더욱 뜻이 깊었다.
김산의 유일한 혈육인 고영광 씨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2002년이었다.
고씨가 그해 재외동포재단의 ‘유공동포모국방문초청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씨는 지난 8월17일 ‘장지락(김산)의 복권 과정과 <아리랑>의 재평가’라는
제목으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부친의 영혼이 조국에 돌아왔다”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광복 60년의 뜻 깊은 날 노무현 대통령이 아버지께 애국장을 주셨다”면서
“아버지의 영혼을 잠시도 떨어뜨려 놓을 수 없어 훈장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니고
있다”며 훈장을 자랑스럽게 꺼내 보였다.
부친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입니까.
“중국의 문화혁명 때
어머니가 일제 첩자라는 누명을 쓴 아버지 때문에 조사를 받으면서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조선인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죠. 그 전에는 아버지가 항일운동가였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부친이 님 웨일스가 쓴 실화소설 <송 오브 아리랑>의 주인공이 김산이라는
사실은 언제 알게 된 것입니까.
“문화혁명이 끝나 갈 무렵인 1976년 <송
오브 아리랑>의 발췌본을 읽고서였습니다. 희미하게 알고 있던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하고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책 속에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한눈에 아버지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송 오브 아리랑>을 쓴 님 웨일스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1976년 그 책의 요약본을 읽고 님 웨일스에게 편지를 썼죠.
님 웨일스가 답장을 보내며 <송 오브 아리랑>을 보내 줘 전편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 몇 번 가 봤지만 만나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습니다.”
아버지가 1983년 중국에서 복권됐습니다. 어떻게 복권이 이뤄지게 됐나요.
“문화혁명 당시에는 아버지를 처형시킨 캉성(康生)이 정권의 실세로 있어
아버지를 위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문화혁명의 광풍이 잦아든 1980년
당시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으로 있던 후야오방(胡耀邦)한테 아버지의 복권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무죄를 증명할 정부기록을 첨부해서요. 다행히 아버지가
일제에 의해 쉽게 회유될 인물이 아니라는 기록이 국민당 문서에 남아 있었죠. 그
외에도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할 정부 문서가 많았습니다. 1983년 1월27일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아버지의 모든 것을 회복시킨다는 공증서를 받았습니다.”
관련 기록이 남아 있었다고 해도 복권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처음엔
아버지와 관련한 기록을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참 막막했죠. 아버지에
대한 증언과 기록을 찾기 위해 아버지를 기억할 만한 노인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다닐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왜 김산의 아들이 아버지의 본래 성인 장씨도, 또 김씨도 아니고
고씨인지 궁금해 합니다. 장씨로 개명할 생각은 없습니까.
“아버지가 공산당에
의해 처형됐기 때문에 내가 장래에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해 어머니가 나에게 자신의
성(姓)을 붙여 주었다가 재가하면서 계부의 성을 따르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장씨
외에도 김씨 등 성을 여러 번 바꿔 활동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성이 무엇인가는 개의치 않습니다. (웃음) 지금 와서 굳이 (성을) 바꿀
필요까지는 못 느낍니다.”
1980년 조선족으로 중국 호적을 바꿨다고 들었습니다. 내친 김에 한국 국적을
취득할 생각은 없습니까.
“아버지가 조선인임을 알고 바로 조선족으로 호적을
바꿨습니다. 사실을 안 이상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죠. 국적문제는 내가 중국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한국 국적으로 바꿀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이중국적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죠. 그러나 중국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아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만났는지 알고 있습니까.
“한족인 어머니도
항일운동 조직원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베이징에서 그 조직의 조직부장으로 있을 때
아버지를 만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산이 이번 광복절에 애국훈장은 받았지만, 고영광 씨는 아직 김산의 혈육이란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족연금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들었습니다사실입니까.
“대통령께서 저에게 직접 훈장을 주셨습니다. 그 자체가 저를 김산의 아들로
인정했기 때문 아닙니까? 연금은 주면 받겠지만 굳이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훈장과 증명서입니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송 오브 아리랑>을 바탕으로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을 제대로
그린 영화로 완성됐으면 합니다. 그때 다시 한번 한국에 오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두 명 있는데 그들이 자주 한국에 오고, 한 명은 꼭 한국사람과 결혼했으면 합니다.”
고씨는 중국 공무원 출신이다. 중국 대외무역경제합작부 과기국 부국장으로 재직하다
은퇴했다. 중국 국가항천국(航天局) 위생처 관리 출신인 중국인 부인 왕위룽(62)
씨와 현재 중국 베이징에서 살고 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는 순간까지도 “67년간 떠돌던 아버지의 영혼이 조국에 돌아오게
돼 너무 기쁘다”고 거듭 강조했다.
[RIGHT]오효림 기자[/RIGHT]
■■■ 김산(金山, 1905~38)은
누구인가?
[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평북
용천 출생인 김산은 미국 작가 님 웨일스의 실화소설 <송 오브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항일 독립운동가다. 그동안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이념적 이유로, 북한에서는 연안파라는 이유로 똑같이 버림받아 왔다.
그는 아나키스트로 독립운동에
첫발을 내디딘 후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을 접하며 ‘체계적 항일’을
위해 사회주의자로 전향했다. 이후 광둥(廣東) 코뮌, 해륙풍 소비에트,
대장정 등 중국혁명에 투신했다. 그는 중국혁명이 조선의 광복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믿었다. 동시에 그는 ‘물속의 소금’이라는 화두를 절박하게
가슴에 안고 살았다. 조선민족 문제가 중국 해방에 녹아 사라져서는
안된다는 뜻의 화두였다. 항일운동 중 1930년과 1933년 두 번이나 일본경찰에
체포됐다가 풀려난 경력이 있는 그는 1938년 당시 중국공산당 실세 간부
캉성에 의해 처형당했다.
김산의 일생은 님 웨일스(1907~97)가
<송 오브 아리랑>을 1941년 뉴욕에서 출판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국내에서도 해방 직후인 1946년 잡지 <신천지>에 일부 내용이
번역돼 연재되기도 했으나 극심한 사회혼란 속에서 이 젊은 혁명가의
삶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김산의 삶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1959년. 리영희(전 한양대 교수) 씨가 도쿄의 한 서점에서
<송 오브 아리랑>을 발견해 국내에 들여오면서부터다. 지하에서
은밀히 돌아다니던 이 책이 ‘아리랑’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공식으로
출판된 것은 1992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