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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사귀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어 있다.’(소설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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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을 뿌려놓은 듯 온통 새하얗다. 가냘픈 목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깨알깨알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출렁거린다. 애초 어디에나 메밀꽃 몇 포기는 무심히 피어 있다. 누가 심지 않아도 어디서 씨앗이 굴러와 박혔는지 자갈밭이나 밭두렁, 사립문 옆에서 싹을 틔운다. 꽃을 피운들 그저 희고, 무 장다리처럼 볼품없어 아낙들의 눈길 한번 받지 못한다.
그 메밀꽃이 봉평에서 바다를 이룬다. 누가 꾸미지도 않았을 터인데 뜨거운 햇살을 받고 이처럼 들판 가득 넘실거리는가? 민초들의 힘겨운 삶이 모시 물 빠지듯 탈색돼 얼룩 하나 없이 하얘져 버린 것은 아닐까?
봉평으로 향하는 길. 남정네들은 달빛에 젖은 메밀밭 옆 방앗간에서 울고 있을 성서방네 처녀를 그리고 있으리라. 여인네들은 순수한 청년 이효석의 애틋한 눈길에 들뜨지 않을까?
봉평은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다. 낭만성과 탐미주의 성향이 짙게 풍기는 이 작품에서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은 삶과 자연의 경계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드넓은 메밀꽃밭은 꼭 허생원(소설 속 주인공) 아닌 누구라도 감정이 달뜨게 마련이다. 지나가는 나그네 그 누구를 붙잡고 문득 막걸리 한잔 걸치며 이야기 한자락이라도 펼쳐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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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메밀은 대단한 ‘물건’은 못된다. 옛적에는 발에 차일 만큼 흔하디 흔한 그저 그런 우리네 먹을거리의 하나일 뿐이었다. 박토마저 그냥 놀리기 아까워 뿌려나 두는 존재였다. 일부러 꽃을 보자고 심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수수하기만 한 게 애처로워 큰 웃음보다 ‘긴 한숨’이 더 어울린다.
그런데도 꽃들에서는 문학의 체취와 아련한 사랑의 추억이 어른거린다. 괜스레 기다림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잊혀졌던 낭만과 추억이 ‘밀물 썰물 놀이’를 계속한다. 어쩌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찾아들면 메밀꽃밭은 어느새 환상의 세계로 돌변해 막혔던 가슴속을 열어 젖힌다.
효석은 갔어도 소설은 여전히 살아남아 ‘사랑타령’이 귓가를 맴돈다. 그 메밀꽃은 늦여름에 피고 또 피어 이제 사람들의 발길을 한껏 잡아끈다. 어떻게 살든 인생은 장돌뱅이 같은 것. 허생원이 나귀와 함께 터벅거렸던 메밀꽃밭에 푹 빠져 꽃에 취하고, 달빛에 젖고 싶다.
[RIGHT]사진·권태균 / 글·윤길주[/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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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