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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량종묘 필유부국(優良種苗 必有富國)’. 곧 좋은 종자가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 신념으로 지금까지 버텨 왔습니다.”
우리 야생 풀꽃, 자생식물 보급의 선구자 장형태(51·대한종묘조경원 대표·061-782-2987) 씨. 그는 평생을 우리 야생 풀꽃과 자생식물의 종자를 개량하고 인공재배에 몰두해 온 보기 드문 사람이다.
그는 그렇게 필생의 노력을 기울여 우리 풀꽃의 종자를 전국에 대량으로 공급하는 길을 텄다. 요즘 서울은 물론 전국 대도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야생 풀꽃과 자생식물은 대부분 장씨가 가꾼 것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는 10월이면 물길이 뚫리는 서울 청계천. 그 주변에는 들개미취·수양버들·강아지풀 같은 한국 전통 자생식물이 물길 옆으로 촘촘히 자리 잡고 있다. 이 청계천에는 한강에서 놀던 청둥오리가 청계1가까지 헤엄쳐 온다. 머지않아 철새도 날아들 것으로 보인다. 이런 날짐승들이 청계천에 둥지를 트는 것은 이들의 먹이인 곤충이 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일등공신은 청계천의 물길 주변에 심은 자생식물 벨트다.
서울의 월드컵공원·여의도공원·서울숲, 광주비엔날레 행사장 등 최근 문을 연 대규모 도시 생태공원에는 어김없이 한반도 산야에 자생하는 야생 풀꽃, 자생식물이 심어져 있다. 요즘은 아파트 단지 조경도 우리 야생 풀꽃, 자생식물로 꾸며야 팔리는 세상이 되었다. 5~6년 전만 해도 팬지·메리골드·사루비아 같은 외래종 풀꽃이 도로변은 물론 공원 등을 점령하디시피 했던 것이 일반적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 많은 자생식물이 갑자기 어디서 온 것일까?
바로 장형태 씨 덕이다. 그는 남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10년 전부터 우리 야생식물과 자생식물을 복원하고, 육종 기술을 개발하는 데 푹 빠졌다.
“씨앗이야말로 가장 높은 부가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장씨는 부친이 종묘 계통 농업을 해서 어릴 때부터 묘목을 생산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말하자면 가업을 이어받은 셈이다. 그가 지리산 자락인 전남 구례로 내려온 것은 1977년. 그의 고향보다 개척할 수 있는 땅이 많았고 기후와 토질이 좋았기 때문이다. 구례는 겨울이 상대적으로 따뜻한 편이어서 동해(凍害)가 적은 것도 유리한 점이었다.
[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그는 처음 구례에서 1,000평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 무렵 농사라고 하면 대부분 벼농사 위주였다. 그러나 장씨는 이때부터 남다르게 키위·단감·매실·배 같은 과실수 묘목을 생산했다. 1981년 전국 최초로 양다래(키위) 묘목을 생산 판매한 것도 그였다. 그러나 과수농사는 특성상 자본 투자에서 회수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려운 농촌 사정상 과수산업은 당연히 어려움이 뒤따랐다.
장씨는 그 활로를 야생화에서 찾았다. 그가 야생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4년. 농촌진흥청 연구사업 일환으로 자생식물을 이용한 분화재배기술 사업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도로변에서 흔히 보아온 메리골드나 팬지 같은 화초는 외국 종자를 수입해 온 것으로 꽃만 지면 폐기해야 하는 한해살이 풀이다. 다음해에는 또 막대한 외화를 들여 이를 수입해야 했다. 장씨는 이는 외화 낭비이며 천편일률적인 꽃심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대안으로 우리 야생화를 인공재배해 전국에 보급하기로 마음먹었다.
[B]척박했던 우리 야생 풀꽃 환하게 피워[/B]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일에 관심을 갖는 지자체나 건설업체는 거의 없었다. 건물을 지으면서 기껏 하는 조경이래야 그저 잔디를 심는 정도였다. 이 때문에 우리 야생 풀꽃이나 자생식물 시장은 전혀 형성돼 있지 않은 실정이었다.
하지만 장씨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지자체나 백화점 같은 곳에서 야생화 전시회를 열고 아파트 건설현장에는 야생화 묘목을 공짜로 제공했다. 한편으로는 우리 식물을 알리기 위해 공무원교육원과 대학의 조경학과·생명공학과·생물과 등을 수십 차례 방문해 우리 꽃을 알려 나갔다. <지피식물(地被植物) 가이드북>을 만들어 조경용 식물을 심는 장소와 관리 요령을 조언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며 허덕이던 그가 대박을 터뜨린 계기는 바로 2002년 월드컵. 그 전까지는 야생 풀꽃이나 자생식물 묘목을 1년 내내 100만 원어치도 팔지 못했다. 그런데 2002년 한 해 동안 그는 무려 20억 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그 후부터 우리 야생 풀꽃과 자생식물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새삼 알고는 전국 곳곳에서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가 운영하는 조경원 시설은 총 6만여 평(시설: 6,350평, 노지: 3만8,650평, 산: 1만5,000평)에 온실만 80여 동이다. 그가 월급을 주는 직원도 14명으로 늘었다. 주문을 소화하려면 대량생산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종자를 개량하고, 인공재배기술도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그가 하는 종자농업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도 전혀 영향받지 않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모든 농산물이 수입개방돼 외국에서 들여올 수 있으나, 우리 야생 풀꽃이나 자생식물은 수입할 수 있는 농산물이 아니다. 더구나 한국은 그동안 이 분야에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개척할 수 있는 영역은 무궁무진한 편이다.
이제 그는 우리 야생 풀꽃이나 자생식물만 고집하지 않고 세계로 눈을 돌렸다. 최근 그는 한국보다 월등한 원예문화와 종묘를 공부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야생 종자를 발굴해 한국으로 들여오고 있다. 종자와 식물 표본을 탐색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캄차카 반도에 이르기까지 그가 답사한 나라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다.
장씨의 서재에는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모은 식물과 씨앗 자료를 정리한 슬라이드 필름첩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 당연히 필름첩 속에는 한라산·백두산·흑산도·백령도·대청도 등 우리나라 산야와 섬에서 자라는 야생 풀꽃과 자생식물 표본이 들어 있다. 여기에 영국·몽골·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이스라엘·남아프리카·캄보디아 등 그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집한 초본류와 목본류 자료까지 추가돼 있으니 가히 그의 보물 1호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종자를 들여오는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자산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식물과 씨앗의 반출·반입을 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는다.
“적은 양이면 공항을 통해서도 들여올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특산품처럼 알려진 튤립도 원래는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입니다. 자기 것만 고집하면 자칫 국수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외국의 꽃이나 원예문화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야생 풀꽃과 자생식물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겁니다.”
최근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도심의 생활환경을 자생식물로 뒤덮인 자연친화적 환경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장씨는 특히 오염된 도시 하천을 정화하는 수생식물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청계천 복원사업을 계기로 전국의 모든 대도시 하천을 생태하천화하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다.
[RIGHT]최영재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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