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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성북구 월곡동과 관악구 신림동 난곡지역에서 ‘천사 아줌마’로 불리는 이가 있었다. 그는 이들 동네에 홀로 사는 노인·지체부자유자 등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하던 말 그대로 ‘천사’였다.
그는 남을 돕는 일에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자원봉사에 너무 열심히 매달리다 과로가 누적됐고, 끝내 암을 얻었다. 견디기 힘든 투병 끝에 그는 지난 9월 숨을 거뒀다. 50세, 너무 아까운 나이였다.
[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아름다운 그 이름은 전영숙 씨. 이제는 그 이름 앞에 ‘고(故)’ 자를 붙여야 한다.
그는 혼자 사는 노인과 가난한 이웃에게 딸이자 며느리였다. 그들의 손과 발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토요일마다 손수 만든 음식으로 100여 명의 점심 끼니를 챙기는 일은 기본이었다. 빗물이 새고 벽이 허물어지는 달동네 집을 아무런 대가 없이 수리해 주는 일에도 빠지지 않았다. 매월 한 차례씩 의사와 간호사를 초청해 무료 진료활동을 벌인 것도 그가 하는 일이었다.
전씨는 또 봉사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배우려고 노력했다.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딴 것도 그런 이유였고, 머리를 직접 다듬어 주기 위해 어깨너머로 배운 이발·미용 기술은 상당한 실력이었다.
이처럼 그에게 주말이나 휴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자원봉사 시간이었다. 자신의 작은 노력으로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보람이었다. 이런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천사 아줌마’가 따로 없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남편 홍순명(52) 교수는 ‘하늘나라’로 거처를 옮긴 아내를 떠올리며 이렇게 토로했다.
“평소에는 유아학습지 교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쉴 틈도 없이 주말만 되면 아침 8시부터 자원봉사 현장으로 달려갔죠. 생활 리듬이 완전히 깨졌던 것 같아요. 병원에 갈 때까지도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모르고 있었어요. 아직도 아내가 머무르던 자리를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든든한 저의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B]부부가 함께 한 봉사의 삶[/B]
전씨는 암 진단을 받은 후 9개월 동안 병마와 싸웠다. 그리고 그를 ‘천사 아줌마’라고 부르던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에도 지난 9월 속절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 그가 이승을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은 “달동네 사람들과 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라도 내 몸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는데…”였다.
[SET_IMAGE]4,original,left[/SET_IMAGE]전씨가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1년, 남편 홍씨를 따라서였다. 서울 삼육의명대 건축설계과 교수로 재직 중인 남편 홍씨는 건축가·목사·교수로서 봉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다 해비타트(집 지어주기 자원봉사활동)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홍씨는 해비타트운동 동참을 건축가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신앙인으로서의 올바른 봉사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홍씨는 아내가 떠나고 없는 지금도 삼육대 건축사회봉사단체와 함께 매년 여름이면 수해 현장을 찾아 복구를 돕는다. 때로는 멀리 몽골까지 해외 봉사활동을 나간다. 홍씨 가족이 몽골 빈민촌 통나무집 짓기에 참여해 지어준 것만도 2003년 6채, 2005년 5채 등 모두 11채에 이른다.
전씨는 그런 남편의 일을 거들면서 자원봉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남편이 제자들과 함께 집 짓는 일에 나서면 전씨는 주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필수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 월곡동 청소년센터에 봉사센터가 설립된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달동네 봉사활동에 나섰다.
딸 예림(21) 씨는 “급식 전날이면 조금이라도 싸고 좋은 물건을 사야 한다며 재래시장을 돌며 재료를 장만하고는 했다”고 말했다. 예림 씨는 “엄마의 헌신적인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고, 엄마를 더 존경하게 됐다”며 “엄마의 뒤를 이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덧붙였다.
[B]“그룹 홈 통해 더 큰 사랑 나눌 터”[/B]
봉사 속에서 보람을 찾는 홍씨 가족. 그들은 독거노인이나 어려운 사람들이 자신들을 통해 잠시나마 웃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끼고 있다. 홍씨는 “궂은 일을 하러 다니는 남편을 타박하지 않고 앞장서서 도와주던 아내가 늘 고맙고 자랑스러웠다”고 말한다.
“저는 새로운 일을 벌이기를 좋아해요. 일을 벌여 놓으면 아내는 뒤따라 오면서 수습하고 정리해 주었죠. 아내가 아프기 전에는 다 제가 잘해서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쓰러지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나 저나 마지막을 준비했습니다. 아내는 죽음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고, 저는 아내가 떠난 후 아내 없이 할 수 있는 봉사를 준비하고 계획하고 있었죠. 지금 아내의 빈자리는 무척 큽니다. 하지만 고인이 마지막까지 바랐던 것처럼 봉사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노력하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전씨가 늘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씨의 희생이 새로운 만남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홍씨 가족. 이들은 더 큰 봉사활동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홍씨 가족은 지금 사는 집을 활용해 아동복지시설을 만들어 본격적인 사회봉사활동을 시작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이를 통해 어려운 이웃에게 한 발 더 다가선다는 계획이다.
홍씨는 “그간의 봉사활동과 그룹 홈을 통해 아이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어른들에게는 기쁨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RIGHT]백창훈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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