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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금만 젊었어도 장학회를 계속 유지할 텐데…, 아쉽죠. 그러나 이제 한국도 예전처럼 학비가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많지 않잖아요? 그래서 마지막 장학금을 뇌성마비 장애학생에게 전달했습니다.”
오시용(60) 한독(韓獨)장학회 이사의 말이다. 그는 마지막 장학금 1,320만 원을 한국뇌성마비복지회에 전달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고국을 방문했다. 마지막 장학금은 24년 전 설립한 장학회가운영상의 어려움으로 해체하며 남긴 출자금이다.
[B]‘한 맺힌 결의’로 장학회 만들어[/B]
한독장학회는 고국의 가난한 학생을 돕기 위해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는 한인 11명이 모여 만든 장학회. 1981년 ‘사정이 어려운 본국 학생을 돕자’는 데 뜻을 같이한 한인들이 1,000~2,000마르크씩 출자했다.
“당시만 해도 저를 비롯해 계약노동자로 독일에 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고국 학생들을 돕는 장학회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많은 분이 흔쾌히 적지 않은 돈을 내놓았습니다. 정부가 독일에서 얻어 쓴 차관의 대가로 국민이 힘들고 위험한 타향살이를 하는 것은 우리 세대로 끝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우리 한인들 사이에 있었죠. ‘한 맺힌 결의’의 산물이었던 셈이죠.”
오씨는 당시 베를린한인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당연직’으로 참여했고, 또 누구보다 장학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오씨 역시 계약노동자로 독일로 건너갔다. 온갖 고생 끝에 현지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독일 이민 1세대다. 누구보다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B]이민 1세대 고령화로 장학회 해체[/B]
그는 계약노동자 신분에서 벗어난 뒤에도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병원에서 허드렛일 등 궂은 일을 하기도 하면서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택시운수업체를 인수해 기반을 닦았다. 현재 그는 한·독 사이에 무역업을 하며 도·소매 매장 4개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어려웠던 시절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래서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일상 중에서도 한독장학회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다. 매년 연말 장학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 음식 장만도 항상 그의 몫이었다.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베를린한인회가 크리스마스에 여는 바자에서 장학회 이름으로 잡채와 불고기를 팔아 기금에 보탰습니다. 보통 1주일간 열리는데 이때는 아무 일도 못하고 바자에만 매달렸습니다. 어느 해엔가는 1주일 동안 고기 500kg, 당면 136박스 분량의 잡채를 만든 적도 있습니다.”
연말 바자로 장학회가 올린 수입은 1,000만 원 선. 장학회는 이 수입과 출자금을 주식 등에 투자해 얻은 수익금으로 운영됐다. 현지 교민사회에 한독장학회의 활동이 소개되면서 한때 출자하겠다는 교민도 줄을 이어 회원이 65명까지 늘어난 적도 있다.
한독장학회와 한국의 끈은 초기 출자자 중 한 명인 권영환 씨의 장인 채모 씨가 맡았다. 채씨는 애초 사위 권씨에게 한독장학회를 만들어 고국의 학생을 도와줄 것을 권하기도 했다. 장학회는 설립 초기부터 1987년까지는 채씨가 한국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을 장학회에 연결해 주면 그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형식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회원이 늘어감에 따라 장학회도 틀이 잡혀 1988년부터는 충남 보령시 청라중학교에 매년 200만 원씩 정기적으로 주었다. 또 1992년부터는 베를린 한인학교에도 장학금을 기부했다.
그러나 이민 1세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학회 운영도 점차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설립 초기 뜻을 같이했던 11명의 이사 중 사망·이민 등으로 현재는 3명만 남게 된 것이다. 올해 환갑을 맞은 오 이사가 가장 젊고, 나머지 두 명은 일흔을 목전에 두고 있다.
“장학회를 계속 끌고 나갈 것인지, 해체할 것인지를 두고 이사들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2세들이 뜻을 이어 장학회를 계속 이끌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죠. 그러나 한인 2세들의 경우 바쁘기도 하지만 한독장학회의 취지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독일 사회는 한국처럼 배움의 정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또 독일에서는 공부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학비는 거의 무료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장학회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죠. 장학회를 하느니 극빈자를 돕는 것이 낫지 않으냐는 것이 2세들의 생각입니다.”
고민 끝에 남은 3명이 모두 정정할 때 ‘아름다운 해체’를 하자고 마음먹었다는 오 이사.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민 2세들이 뜻을 이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장학회 해체의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장학회 해체를 결정한 뒤 오 이사는 남은 기금 중 베를린 한국학교에 3,000만 원을 기탁하고, 독일 한인회에 컴퓨터 5대를 기증한 뒤 남은 1,300여 만 원을 어떻게 값지게 쓸지 고민했다.
“마지막 장학금인 만큼 값지게 쓰고 싶었죠. 한국도 이제 잘살게 되면서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많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는 분께 값지게 쓸 수 있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소개받은 곳이 한국뇌성마비복지회다. 오 이사는 지난해 12월13일 한국뇌성마비복지회를 방문해 장학금 1,320만 원을 기부했다. 오 이사가 수혜자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 위해 귀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뇌성마비복지회를 방문했을 때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공부하는 학생·선생님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장학회를 해체하는 것이 아쉽지만 고생해서 이끌어 온 한독장학회의 마지막 사업으로 그분들을 돕게 돼 정말 기쁩니다.”
[RIGHT]오효림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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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