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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화마가 들이닥친 동해안 일대는 온통 시뻘건 불바다였다.
강풍에 제 몸을 맡긴 불길은 춤을 추듯 골짜기를 타고 내려왔다. 화마는 골짜기 양쪽 능선 수백 미터를 제집 드나들듯 넘나들었다.
불길은 세찬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논바닥에 피신시켜 놓은 소들도 눈 깜짝할 새 숯검정으로 만들어 놓았다.
산림청으로부터 하청을 받아 숲 가꾸는 일에 나섰던 오태봉(33·동부지방산림청) 씨. 당시 ‘기능인 영림단’소속이었던 그도 이 산불과의 전쟁 한복판에 있었다. 끼니는 헬기가 공수해주는 주먹밥으로 해결했다. 진화 장비는 등짐펌프와 곡괭이, 무전기가 전부. 진화 작업 중인 것도 모르고 마을에서 맞불을 놔 불 속에 갇혀 있다가 겨우 탈출하기도 했다.
바람은 수그러들 줄 몰랐고 불길은 잡히지 않았다.
혀를 날름거리며 온 산을 잿더미로 만드는 불길이 무서워질 때마다 오씨는 자신과 가족을 지켜준 산에 대한 고마움에 마음을 다잡았다. IMF 이후 정리해고됐던 오씨가 당시 잡은 구명줄이 바로 숲 가꾸기 공공근로사업이었기 때문이다.
[B]숲 가꾸며 사회에 대한 원망·분노 사라져[/B]
지옥 같은 일주일이 지난 후 바람이 잦아들며 불길이 잡혔다. 그러나 그 일주일 동안 동해안 지역 2만3000여 ha의 산이 다 타버려 시커먼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
오씨는 ‘산이 제 모습을 찾으려면 50년이나 걸릴 텐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숲을 지키는 데 인생을 걸어보자고 다짐했다. 오씨의 삶에 있어 동해안 산불은 가장 힘든 순간이기도 했지만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1997년 말에 불어 닥친 외환위기는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앗아갔다. 오씨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들어간 대기업에서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직장생활을 보냈다. 영업직으로 시작해 인사팀으로 옮길 때까지 주위 동료들보다 많은 월급을 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8년 회사는 그에게 정리해고를 통고했다.
당시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일거리를 찾아나서야 했다. 그러다 시작하게 된 일이 산림청에서 시작한 ‘숲 가꾸기 공공근로사업’이었다. 지원 근로자 가운데 어린 편이었던 그에게 10kg이 넘는 체인톱이 배당됐다. 그리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힘들게 일한 그의 손에 일당 2만7000원이 쥐어졌다.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일을 시작한 지 3일이 지나자 온몸이 쑤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틀을 쉰 그는 다시 산으로 향했다.
꿈속에서도 그는 체인톱으로 간벌(나무를 솎아주는 작업)을 했다. 아내가 그를 깨웠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기에 팔을 그렇게 흔들어 대냐?’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정리해고됐다는 사실과 산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에서 숲과 나무를 가꾸며 그의 마음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사회에 대한 분노와 원망만이 가득했던 마음이 어느덧 편안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겁게만 느껴졌던 체인톱도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산속에서 일을 할 때면 마치 어머니의 품에 들어와 있는 듯 편했다.
그는 1년 6개월간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를 해 ‘산림기사’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했고, 영월에서 직접 숲 가꾸기 기능인 영림단을 만들어 숲 가꾸기 사업을 했다. 새벽 5시부터 저녁까지 고된 일과가 계속됐지만 그는 조금도 힘든 줄 몰랐다.
숲 가꾸기 사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던 2003년에는 청원경찰격인 ‘청원산림보호직’에 합격해 영월국유림관리소에서 산림보호 업무를 하게 됐다.
[B]용기·희망·미래 준 산에 은혜 갚을 것[/B]
그의 산을, 숲을 향한 꿈과 열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구상하는 대로 숲을 가꾸고, 산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2003년부터 1년 동안 임업직 공무원 9급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했다. 업무를 끝내고 저녁을 먹은 후 밤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독서실을 찾아 공부했다. 잠자는 시간이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되지 않아 사흘이 멀다 하고 코피가 났다. 아이들이 놀아달라고 조르는 주말에도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드디어 필기시험에 통과하고 면접만 남았다. 다행히 면접관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청원산림보호직에 있을 때 산림청에서 근무하던 그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의 질문은 “살면서 언제 가장 힘들었나?”였고 오씨는 “2000년 동해안 지역 산불 때 진화하던 일”이라고 대답했다. 면접관의 질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씨는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다른 질문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후 산림청 본청으로 출근하라는 합격 통지가 왔다. 그는 2004년부터 강릉에 있는 동부지방산림청에서 임업직 공무원으로 일하며 숲에 대한 사랑을 펼치고 있다.
현재는 대학에 다니며 현장경험에 비해 부족한 지식을 채워 나가고 있는 오씨는 임용 첫해 산림청에서 주는 지식최우수상과 홍보최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산림 업무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평가다. 건조주의보가 내려진 요즘은 다른 산림청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비가 오지 않으면 언제나 ‘산불 비상대기’ 상태다. 휴일이 되어도 비가 와야지만 가족과 함께 마음 편히 쉴 수 있다. 산에 대한, 숲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산은 제게 용기·희망·미래를 안겨줬습니다. 회사에서 정리해고 당한 후 삶이 힘들었을 때 산이 제게 준 걸 갚으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제가 이제 그 은혜를 갚아야지요.”
[RIGHT]이병헌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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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