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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독도 인근 해역 탐사계획을 국제수로기구(IHO)에
통보하고 기어이 탐사선을 출발시킨 바로 그 날. 그날로부터 꼭 8일이 지난 날 노무현
대통령은 장문의 담화를 발표했다.
독도가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빼앗긴 우리 땅이라는 역사, 그러므로
독도는 완전한 주권회복의 상징이라는 논리, 가장 강렬하게는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어떠한 비용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습니다”라는 두
줄. 한 나라의 통수권자로서의 의지를 만천하에 표명한 것이다.
그래서 이미 전 세계의 뉴스 채널이 보도한 대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까지
중재에 나서야 할 상황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은 빼고 ‘국민 정서’만
놓고 보자면, 이 상황이 통쾌하지 않을 사람이 있기는 할까? 그건 그렇고, 이토록
완벽하게 통합된 국민 정서는 언제부터 형성됐을까?
1982년부터 ‘독도는 우리 땅’ 불러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질문을 듣자마자 통기타를 든 정광태의 영상을 떠올릴 사람이 꽤
많을 듯 싶다. 1980년대 초, 정확히는 1982년 그의 기타 반주에 맞춰 ‘독도는 우리
땅’을 따라 불러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히트곡 덕에 스타가 되거나 재산을 축적했다는 가수 얘기라면 그야말로 쌔고 쌨다.
하지만 히트곡 때문에 국가 영유권에 헌신하게 된 가수라면 정광태 말고는 없을 거다.
대통령의 담화 발표가 있은 지 꼭 6일 후인 지난 5월 1일, 정광태는 독도에 있었고,
그로부터 4일 후에는 올림픽공원에서 ‘독도의 날’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독도는 우리 땅’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시시덕거리는 여고생들에게
“아저씨가 이 노래 부른 사람이거든”하고 말을 건네며, ‘독도는 우리 땅’의 가사가
5절까지 적힌 그림엽서를 나눠주면서.
제가 저 학생들 또래였을 때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 가수를 만났다면, 아마
사인 받으려 난리였을 텐데요.
“그래도 한 소절 불러주면 아이들이 ‘알아요!’ 하고 소리칩니다. 내가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 이유는 다들 우리 땅인 줄 알기는 하지만 ‘아! 이래서 우리 땅이구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곡을 짓고 노랫말을 쓴 박인호 PD 역시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1982년에 교과서 왜곡사건이 있었고, 이 노래로 일본의 주장이 왜 거짓인지를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죠. 그러니 내 얼굴 모르는 거야 무슨 상관이겠어요? 노래만 알면 됐지요.
더 좋은 건 저 아이들과 함께 독도로 가는 것이고요.”
“독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다할 것”
독도
명예군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노래 한 곡 때문에 그처럼 인생을 바꿀
수 있었는지요.
“저는 인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역사학자도 아니고, 정부의
주요 인사도 아닙니다. 1982년에 전 개그맨이었고 지금도 연예인입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독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뿐입니다. 2002년에는
선후배와 함께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뗏목으로 건넜고, 이듬해에는 같은 길을 릴레이
수영으로 건넜습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대한의 여성 서른세 명이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런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할 뿐입니다.”
그래도 ‘독도는 우리 땅’의 가수라는 의무감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저는 독도로부터 아주 큰 선물을 받은 사람입니다. 1983년에
처음으로 울릉도에 갔었습니다. 그땐 민간인은 독도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홍순칠 독도의용대장이 직접 초대해주셨고, 감사패도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에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독도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때는 배를 댈 수
있는 시설이 없어, 독도 최초의 주민이신 최종덕 할아버지의 목선을 타고 독도로
갔습니다. 그분 역시 지금은 고인이 되셨는데,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 나를 데리러
울릉도로 오셨어요. 날 보시더니 ‘이 자식 여기 왜 왔어?’ 하는 눈으로 쳐다보시더라고요.
완전히 ‘노인과 바다’였죠.
그분의 조각배를 타고 파도에 쓸려 독도에 내렸는데, 얼마나 아름다운 섬이었는지,
안 가본 사람은 모릅니다. 그날, 독도경비대가 나를 위해 예포를 쏘아 주더군요.
그날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독도를 향한 짝사랑요. 어떤 인연이나 숙명인 것 같기도
해요.”
‘독도는 우리 땅’을 녹음하게 된 데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면서요?
“그
노래를 처음 부른 건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였는데, 혼자가 아니라 네 명이 불렀습니다.
임하룡, 장두석, 김정식, 그리고 나. 레코드사에서 취입을 하자고 해 다 같이 만나러
갔는데 레코드사 사람이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오지 않는 거예요. 다들 가고
나만 남아서 그를 기다렸고, 결국 음반 취입을 저 혼자 하게 됐습니다. 제겐 큰 행운이었던
셈이죠.”
미국영주권을 포기하고 독도로 본적을 바꿨는데, 결단하기가 어렵지 않았나요?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형, 독도 문제가 너무 커’ 하는데, 순간 ‘독도는 독도경비대가
지키고 해양경찰이 지키는데, 내가 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순간 후배가
‘형은 미국에 살면 안 되잖아요. 독도는 우리 땅 부른 사람이잖아’ 하자 곧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알았어’ 하고는 한국에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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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영주권 포기하고 독도로 본적 옮겨
1996년은
‘독도는 우리 땅’이 금지곡에서 풀려난 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정치·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과 관계돼 있는 인생도 쉽진 않았겠어요.
“이 세상에 어렵지
않은 일이 어디 있나요. 내가 ‘독도는 우리 땅’을 처음 부른 날로부터 24년이 지났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슴에 품고 사는 말이 있습니다. 1954년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이었던
변용태 님 말씀입니다. ‘독도는 일제 침략 최초의 희생물이었다. 대한민국 독립과
함께 대한의 품으로 돌아왔다. 독도는 대한민국 독립의 상징이다. 독도에 손을 댄
자는 한민족의 엄청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단 몇 개의 바위 덩어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영예의 장이다. 독도를 잃고서야 어찌 애국을 생각하겠는가. 일본이 독도를
침략하려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재침략이라는 것을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할 것이다.’
1954년이나 지금이나 상황은 같습니다.”
지난 5월 1일 독도에 다녀왔다고 들었는데요. 이번 독도행은 어땠습니까?
“지금
독도는 법적으로는 누구라도 갈 수 있는 섬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섬이
허락해줘야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바다가…. 독도로 들어갈 수 있는 기상조건이
되는 날은 일년 중 40일에서 45일 정도라고 합니다. 그날도 독도는 아름다웠습니다.
내가 우스개로 걸곤 하는 주문이 있습니다. ‘일본은 가라앉아라, 일본은 가라앉아라.’
그랬더니 이종상 교수님이(1972년에 5000원권 지폐를 디자인하셨던 분으로 나 못지않게
독도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그러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사죄를 받기 전까지는 가라앉으면
안 된다고요. 독도는 정말 민족적인 자존심을 대변하는 섬입니다. 우리가 독도를
지켜주고 있는 게 아니라, 독도가 우리 민족의 자존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도가 우리 민족의 자존 지켜줘”
24년
동안 ‘독도는 우리 땅’을 불러온 정광태에게 독도란 어떤 존재입니까?
“지난해
책을 하나 냈습니다. 역시 독도와 관련된 거죠. 유성이 형(전유성)이 추천사에 이렇게
썼습니다. ‘정광태는 독도 같은 사람’이라고 말이죠. 독도 같은 사람이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돌 같은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독도가 돌이니까요.
“명명백백한
자국 영토도 주장하지 않는 자에게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기 영토를 잃고 잃어
한반도 좁은 땅덩이에 정착한 민족이 있습니다. 그 민족의 선조들은 광활한 만주벌판을
거친 숨결로 호령하던 당당한 기마민족이었습니다. 오늘 그 민족이 주인된 도리를
다하지 못해 또 하나의 영토를 빼앗기려 하고 있습니다. 훗날 그의 후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끄러운 선조를 가졌다고 말입니다.”
한 편의 웅장한 시 같은 말을 남기고 정광태 씨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며칠
후 나는 그 마지막 대사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 줄을 알게 됐다. 정광태 씨가 술자리에서건
무대 위에서건, 언제나 똑같은 대사를 시처럼 읊고 사라진다는 것을. 아마 스스로를
독도에 붙잡아두기 위한 다짐의 의미가 더 클 것이다.
정다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