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 정발산동에 위치한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의 실내는 쾌적했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집 안 구석구석 작품들을 감싸고 있었다. 김겸 대표의 손톱은 깔끔했다. 정갈한 집의 공기와 단정한 그의 매무새는 행여 복원할 작품에 흠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그의 오랜 습관이다. 일반인은 보존복원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의 복원작업에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동상을 생각해보자. 누군가 돌보아주는 이가 없다면 그 숱한 비와 바람, 매연과 미세먼지, 페인트 덧칠과 거친 솔질로 훼손될 뻔했던 그가 그토록 늠름히 서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원재료의 미덕을 그대로 살리면서, 손상되고 갈라진 부분을 복구하고 메꾸는 게 그의 일이다. 최근 그는 <시간을 복원하는 남자>라는 책을 펴냈다. ‘왜 복원가의 책은 없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결국 사람 이야기로 이어진다. 유물 안에 담긴 소중한 무언가도, 보존하고 복원해 지키려는 애씀도 결국 사람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다.
“워낙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습니다. 하지만 수줍음과 낯가림이 많죠. 그런 저에게 유물을 복원하는 일은 너무 잘 맞습니다. 유물을 복원하다 보면 그 시대와 그 사람과 만나는 기분입니다. 흡사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죠. 그 작품을 만들 때의 작가의 마음과 그 안에 담긴 사연이 찾아와 말을 거는 느낌입니다.”
치료보다 중요한 관리
김겸 대표는 그 말을 귀담아듣는다. 행여 원작자의 의도가 훼손되지 않도록 잘 가려듣고 작업한다. 작품에 남은 붓질과 색감을 통해 작가의 성품과 스타일을 짐작하기도 한다. 새벽 3~4시에 문득 깨어 내려와 작업을 이어가는 것도 흔한 일이다. 복원에는 완성이 있을 수 없어서 이미 마치고 세상에 내보낸 작품도 때때로 생각나 한 번씩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 이성자 ‘ Deux formes’(1958,oil on canvas)를 복원하고 있는 김겸 대표 ⓒ이성자기념사업회
“유물을 복원한다는 것은 복원이 끝난 후 드러나는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복원 과정을 통해 전통 기술을 전승한다는 의미도 깊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외관보다 중요한 건 그 시간의 의미를 건강하게 계승하는 겁니다.”
그런 그의 눈으로 볼 때 현재의 복원 작업은 안타까운 측면들이 있다. 숭례문 복원 공사가 단 3년 안에 이루어진 일도 그렇다. 서울 중심부에 자리 잡은 궁궐은 현재에 사는 과거의 흔적이다. 이 과거를 현재의 속도에 맞추어 복원하는 건 ‘원상 복구’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영국의 링컨 대성당 복원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1311년 완공된 대성당은 자체 복원팀에서 매일 복원하고 있고 성당 전체를 한 번 손보는 데는 70년이 걸린다고 한다. 70년이 지나면 다시 처음부터 이 관리를 시작한다. 이들의 복원 개념은 ‘치료’가 아닌 ‘관리’다.
김겸 대표가 작업하는 방식은 응급실의 의사와 비슷하다. 그에게 당장 위급한 작품들이 찾아와 숨을 헐떡인다. 일단 처치를 해서 급한 고비를 넘긴다. 워낙에 야전병원의 성격이 짙어 그 스스로도 연구소를 병원처럼 생각한다.
“작품이 태어난 시대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당시의 재료들과 구조방식이 반영되어 있죠. 그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옮기거나 보관하면 작품에 손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한 갤러리에서 독일 현대 작가의 오브제인 석고상이 운반 도중 부서져 반 정도가 가루가 된 일이 있었다. 사색이 된 큐레이터는 그에게 구조를 부탁했다. 석고 작품 복원 경험이 풍부했던 김겸 대표는 밤을 새워가며 원래 모습을 복구해주었다. 전시는 무사히 마쳤지만, 김 대표는 며칠을 앓아누웠다고 했다.
“복원가의 특권은 작품을 직접 만질 수 있다는 데 있지요. 좋아하던 작가의 작품을 제 손으로 만질 때는 마음이 설렙니다. 하지만 그만큼 고된 작업이기도 하지요. 제가 원래 왼손잡이인데 지금은 왼손을 잘 못 써요. ‘테니스 엘보’라고 부르는 상과염이 심해져서요. 작업할 때 대부분 오른손을 사용합니다. 워낙 많은 화학제품을 쓰다 보니 기관지도 많이 약해져 있고요. 만성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편입니다. 한겨울이든, 한여름이든 야외에 있는 구조물의 복원 의뢰를 받으면 그대로 작업을 진행해야 하니, 복원가가 결코 우아한 직업은 아니죠.”
때문에 그는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한국에서 미술사와 미술비평을 전공하고 일본과 영국에서 보존복원을 공부한 김 대표는 현재 미술품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건국대학교 교수를 겸하고 있다. 그의 연구소에는 그에게 배우는 제자들이 함께 머문다. 그는 좋은 스승이란 그의 복원기술뿐 아니라 삶의 모습까지도 닮고 싶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본에서 만났던 복원가 마키노 다카오가 그에게 그런 스승이었다.
“책이 출간된 뒤에도 출간기념회에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마키노 선생님 같은 스승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지요.”
일본 전통 목조 불상 복원가인 마키노 다카오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인 김겸에게도 공평하게 중요한 작업을 맡겼고 변함없이 믿고 기다려주었다.

▶ 1 청계광장에 있는 클래스 올덴버그 ‘Spring’ 2006, 김 대표가 보존복원 작업을 담당하고 있다. 2 이성자 ‘오작교’ 1956, 캔버스에 유채 3 김겸 대표의 아버지 김수익 작가의 ‘가족(사랑)이야기’ 2018, oil on canvas 4 김수익 ‘가족(사랑)이야기’ 2000,oil on canvas 5 고 문익환 목사의 피아노 및 옆에 있는 판화 작품 등 수십 점도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에서 복원했다. ⓒ김겸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가 남긴 길
전통과 근대, 동서양을 오가던 그의 복원사는 현대사에까지 이른다. 2015년 그는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를 복원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운동화는 열사가 걸어온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운동화는 1987년의 그 치열하던 한때를 담고 있고, 한 청년의 삶이 멈추던 순간을 상징하고 있다. 복원이란 곧 사람의 이야기를 만나는 일이며, 그가 걸어온 삶을 만나는 일임을 명징하게 느낀 순간이었다. 그가 복원한 운동화는 김숨의 소설 /l의>가 되었고, 영화 ‘1987’이 되었다. 장준환 감독은 이 영화를 “한 켤레의 운동화에서 시작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 1987년 이한열 열사가 신고 있었던 운동화를 복원하는 과정, 김겸 대표에게도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김겸
“한 물건의 복원이 한 시대를 복원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본 순간이었죠. 과거의 유물을 복원한다는 건 과거의 시간을 복원한다는 것이고 그 시간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비추어볼 힘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의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일이죠.”
복원에는 정답이 없다. 깨끗하게 닦되 해치지 말아야 하고, 부서진 부분을 붙이되 그 각각의 독립성이 훼손되어선 안 된다. 김겸 대표는 서로 상충되는 두 가치의 합의점을 찾아가는 복원의 작업이 바로 보존복원의 매력이라고 했다. 애초 그는 아버지 김수익 작가처럼 화가가 되고 싶었다. 고달프고 가난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는 총명한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결국 그는 예술품을 고치는 의사가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산다.
“마음을 다해 노력하라. 그러면 의도하지 않은 충만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유슬기│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