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시작과 마지막이 중요하듯 사람도 마찬가지일 게야. 죽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 사람이 태어난 곳은 고향이라는데 사람이 묻히는 땅은 뭐라고 하느냐? 거기에도 이름이 있어야 할 거야. 고향이란 말에 못지않게 정다운 말이 있어야 할 거야.”
김소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은 이렇게 시작한다. 고려인 희곡 문학을 대표하는 한진의 단편소설 <그 고장 이름>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을 다니던 북한 유학생 8명이 1958년 소비에트연방으로 망명한 이후 그들 삶의 궤적을 그린 영화의 시작은 죽음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서 태어난 이들은 북한에서 소련으로, 다시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흩어진 북한 출신 고려인 1세대다. 중앙아시아에서 신문기자, 영화감독, 희곡작가 등으로 살며 고려인 문화를 부흥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2014년부터 ‘망명 3부작’을 발표해온 김 감독을 5월 11일 서울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5월 11일 서울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소영 감독
“죽음에 대한 태도에 굉장한 호기심”
-3부작의 세 번째 영화는 죽음에 대한 서사로 시작한다. 태어난 곳을 떠나 디아스포라로 살다 보면 지금, 여기에 태어나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죽음에 대한 시각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굉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어요. 키르기스스탄의 한 고려인 할머니가 자기 한복 수의를 벽에 걸어놔요.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걸 (방송을 통해) 보고 어떤 강렬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죽음을 대하는 문화, 그 문화가 가진 굉장한 깊이와 차이, 이런 것들이 좋았어요. 아직 번역은 안 됐지만 인류학 저서 중에 <타림의 무덤>이라는 책이 있어요. 지금의 예멘 사람들이 과거에 인도양을 건너 말레이시아 등으로 흩어지는데, 그 사람들이 몇백 년에 걸쳐 이주를 하다 보니 타림이라는 곳에 무덤이 생긴 거죠. 이들에게는 거기가 새로운 탄생지인 거예요. 죽으면 묻히고 자손들이 찾아오는 곳. 그런 인류학적 죽음을 다른 문화의 탄생으로 보는 시각에 관심이 있어요.
-<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2014),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2017), 그리고 5월 2일 개봉한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까지 망명 3부작이 모두 고려인의 이야기이면서 떠나온 사람들의 삶을 따라간다. 망명 3부작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어릴 때 나치즘 때문에 망명한 철학자들의 책을 읽었어요. 그걸 계기로 망명을, 다시 사유할 수 있는, 사회를 뒤집어 볼 수 있는 조건으로 생각하게 됐죠. 2000년에는 여성 내부에서의 이주 이동에 관한 영화 <거류>를 만들었어요. 결혼 자체를 내부의 이주라고 본 거죠. 영화 <거류>가 망명 3부작으로 오는 그 길의 첫 번째 다큐였어요.
▶1956년 11월 북한 국비 유학생인 정린구, 김순자, 허웅배, 한대용(한진), 리경진, 김종훈, 리진황이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기숙사 앞에서 찍은 사진(왼쪽부터)│시네마달
고려극장은 극장 이상의 극장인 조국
2014년 촬영을 시작한 영화는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출신의 북한 망명자 8명 가운데 최국인 영화감독을 중심 인물로 삼았다. 촬영 중간인 2015년 4월 최 감독이 노환으로 숨지면서 영화에는 마지막 생존자 김종훈 씨와 고(故) 한진 작가의 아내 지나이다 이바노브다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 고려극장의 2세대 극작가로 활약한 한진은 무대라는 조국에 남한과 북한을 모두 올려놓은 인물이다. 경계인이었던 그는 당시 비민주적인 양쪽 체제를 모두 비판했다. 남한 병사와 북한 병사의 갈등과 미완성의 화해를 그린 <나무를 흔들지 마라>(1987), 고려인 문인 가운데 처음으로 5·18민주화운동을 세상에 드러낸 희곡 <폭발>, 소비에트연방의 뇌물 관행을 풍자한 <나 먹고 너 먹고>(1983), 베트남 파병을 비판한 <고용병의 운명>(1967),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한 <산부처> 등을 남겼다.
중앙아시아 순방을 다녀온 문재인 대통령이 4월 22일 방문한 곳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자리한 고려극장이다. 문 대통령은 고려극장에서 강제 이주의 애환을 담은 연극 <열렬히 축복하리라>를 관람했다.
-한진은 고려인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나?
=(소비에트연방 총리였던) 스탈린은 소수민족에 대한 언어 말살 정책을 펼쳤어요. 고려극장, <고려신문>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역량이 축소될 때 북한 출신 엘리트들이 들어가서 희곡도 쓰고 <고려신문>에 기사도 썼죠. 한진 작가의 경우는 고려극장의 한 시기를 엄청나게 활성화했어요. 한국어를 잊은 고려인 3세대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는 분이었지요.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에게 극장 이상의 극장이었다. 조국이었다. 극장 60주년 회고록에서 한진이 극장을 표현한 말이다. 1937년 9월 스탈린의 소비에트연방 정부는 고려인 2500여 명을 일본군 스파이란 죄목을 씌우고 사살한 뒤 고려인 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다. 17만여 명의 고려인이 짐짝처럼 기차 화물칸에 태워져 강제 이주됐다. 강제 이주 과정에서 2만여 명이 굶주림과 추위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인들은 기차를 타고 한 달 넘게 6000여㎞를 달렸다. 들어본 적 없는, 알지 못한 곳에 별처럼 떨어졌다. 그렇게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흩뿌려졌다. 고려인들은 극장에서 함께 울고, 웃었다.
▶영화 <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의 한 장면
“경계나 외부에서 한국 영화 보고 싶었다”
-대다수 고려인이라고 하면 연해주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반면 영화는 북한 출신의 고려인들이 주인공이다. 어떻게 이분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나?
=감독이면서, 제가 연구자이기도 해서 한국 영화사 초대 연구를 3년간 했어요. 책임 연구자였는데 다른 방식으로, 경계나 외부에서 한국 영화의 역사를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소련, 중앙아시아 쪽을 찾아보니 최국인, 송 라브렌치 감독 이런 분들의 이름이 나오더라고요.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가서 한국 영화사 토대 작업을 하며 고려인들의 역사, 삶과 죽음의 문화를 만난 거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 연구자로서 고려인 출신의 영화감독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 영화에는 어떤 세계관이 담겼나?
=송 라브렌치 감독의 영화 <고려 사람>이 되게 재밌는데 (함경도 사투리와 비슷한) 한국어를 굉장히 유창하게 하는 여러 사람이 나와요. 그런데 이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고려인이 아니죠. 쿠르드인이나 러시아인이었어요. 왜 그런가 보면 고려인들이 맨 처음에 이주하고 정착하면서 빨리 농장에서 ‘노력 영웅’이 되잖아요. 농장에서는 고려인들이 리더니까 새로운 세계주의가 시작된 거죠. 하위 주체의 세계주의요. 밑에서 다른 세계를 구성해나가는 건데, 그게 단일민족이 아니라서 가능한 거예요. 이분들만 해도 카자흐스탄에서 굉장히 많은 소수민족과 삶으로, 예술로 접촉하고 살아가거든요. 송 감독은 홍범도 장군 같은 고려인 영웅들의 삶을 다룬 영화도 만들었고 한편으론 유라시아의 생태 문제, 소수민족 문제에 집중했어요. 최국인 영화감독 작품 가운데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된 <용의 해>는 위구르족의 실패한 봉기를 담은 영화예요. 비록 실패하지만 계속되는 저항을 그린 영화의 맨 마지막에 자막이 쫙 떠요. 위구르족이 봉기한 해들이죠. 그게 되게 감동적이에요.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청춘>의 한 장면.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북한 유학생 집단 망명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 김종훈 씨의 옆모습이 담겼다.│시네마달
-망명 2부라고 할 수 있는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는 고려극장에서 활약한 배우 이함덕과 가수 방 타마라의 노래 인생을 그렸다. 고려극장의 전 지휘자 한야곱이 작곡한 고려 아리랑을 실제로 들은 적이 있는데 한국의 아리랑과는 다른 음악이었다. 카자흐스탄 유목민족의 힘찬 기상과 우리의 애환이 동시에 느껴졌다. 정말 새로웠다.
=정확하게 그런 느낌이에요. 영화에서도 그 장면이 나오거든요. 퓨전음악이라면 퓨전이고, 월드뮤직이라고 하면 월드뮤직이죠. 전혀 새로운 월드뮤직을 한야곱 선생님이 만드셨고, 한진 선생은 세계 문학을 쓰셨고요. 북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구성, 새로운 충돌을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 같아요.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려인의 역사가 비슷하다. 영화는 그에 비해 고려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강제 이주 이후, 어떤 희생자의 삶을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물론 그런 면은 있지만 강제 이주 이후에 엄청나게 다른 세계를 일군 사람들이기도 해요. 한 고려인 할머니는 “이주를 했기 때문에 다른 유토피아를 만났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왜냐면 그들이 사는 곳이 연방국가잖아요. 물론 그 할머니 사례가 극단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역사의 능동적인 결들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거죠. 저는 그래서 이분들이 일군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많이 보여주려 했어요.
▶영화 <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의 한 장면
“디아스포라 문화재로 삼았으면 좋겠다”
-1932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에 처음 설립한 극장은 크질오르다, 우슈토베를 거쳐 196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이전했다. 사라진 옛 고려극장들도 가보았나.
=고려극장은 근대 문화재라고 할 수 있어요. 특히 현재는 폐허가 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시절의 고려극장 근처에 과거 배우 이함덕 선생이 머물던 곳, 배우들의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저는 이걸 정부가 고려인 헤리티지(인류 유산)로 삼았으면 좋겠어요. 디아스포라 문화재로 고쳐서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소영 감독이 다큐멘터리로 기록한 고려인들의 삶, 그리고 현실은 한반도 바깥에서 그들이 이룩한 새로운 문화다. 특히 망명 3부에 해당하는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은 강제 이주한 대다수 고려인 사이에서 북한 망명자 1세대로서의 고려인, 소비에트연방의 봄과 북한의 정치적 겨울 사이에서 고뇌했던 북한 지식인, 소비에트연방 유학생으로서 첫 집단 망명자, 남한과 북한 모두를 아울렀던 카레이스키 예술가들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망한다. 김소영 감독의 영화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역사다.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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