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천에서 엄마와 함께. 촬영 내내 딸 은화 씨는 엄마를 살뜰히 챙겼다. 그들에겐 서로 전쟁터를 헤쳐 나온 동지 같은 느낌이 있다. │곽윤섭 기자
부모님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아들딸이 기억과 추억을 더듬어 직접 쓰기도 하고, 전문 작가나 업체에 의뢰하기도 한다. 자서전 쓰기 강좌를 여는 지역 서점도 여럿 있다. 출판편집자 출신인 김은화(32) 씨가 곧 내놓을 여공 출신의 엄마 이야기 <나는 엄마가 먹여살렸는데>는 구술생애사 책이다. 구술생애사란,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인터뷰하는 것이다. 은화 씨는 총 6회, 약 14시간의 인터뷰를 통해 엄마의 생애사를 듣고 작업했다. 은화 씨는 망원시장 여성 상인 9명의 구술생애사 책 참여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4월 29일, 볕 좋은 봄날 오후에 은화 씨가 사는 동네를 찾았다. 카페에서 만나 불광천을 같이 걷고 그가 사는 집까지 동행하며 긴 수다를 떨었다. 그 자리엔 자서전의 주인공인 은화 씨의 엄마 박영선(63·가명) 씨도 함께했다. 표현을 크게 하지 않는 엄마 영선 씨의 말 너머의 말, 말하지 못한 말은 자서전 속 문장의 일부로 대신한다.
“엄마는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두 시간 동안 공부하고 6시가 되면 압력솥에 밥을 올렸다. 할아버지 밥상부터 오빠 도시락까지 하루 열 끼를 차릴 때였다. 엄마는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출판물류회사에 다녔다. 종일 쪼그리고 앉아 반품들어온 책을 풀고 분류해서 날랐다. 허리와 무릎에 부담이 많이 가는 일이라, 새벽마다 근육통으로 앓기 일쑤였다.”
▶40여년을 노동자로 살아온 엄마의 손│김은화
뚝뚝 끊기다가 어느 시점부턴 쏟아내
-어떤 이유로 엄마의 구술을 받아내기로 마음먹었나.
=올해로 결혼 4년 차다. 엄마는 나를 만날 때마다 과거를 곱씹었다. 외할머니는 어쨌고, 자기가 결혼할 때는 어땠는데 하는 옛날이야기가 라디오처럼 흘러나왔다. 마지막은 꼭 “내가 요 모양 요 꼴로 살지 아무도 몰랐지” 하는 푸념으로 끝났다. 엄마가 자기 자신에게 붙인 ‘이혼’과 ‘가난’이라는 수식어 앞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모든 게 내 탓 같아서, 이대로는 내가 마음 놓고 행복해지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덜 미안하기 위해서 엄마가 자기 삶을 긍정하게 되기를 바랐다.
-실행은 또 다른 관문이다. 어떻게 준비했나.
=<할배의 탄생> 등의 저작으로 유명한 최현숙 작가와의 만남은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대문자 역사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보편과 정상을 의심하며, 가난을 옹호해온 그다. 그의 <소문자 ‘삶’이 말하기 시작했다> 구술사 강좌를 들으며 엄마 자서전 채비에 들어갔다. 2017년 초여름이었다.
-망원시장 여성 상인 9명의 구술생애사를 담아낸 책 <오늘은 맑음>(개정판 <이번 생은 망원시장>)에도 참여했다. 최현숙 작가를 중심으로 여럿이 함께 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혼자 하는 출판이다. 곧 출간 예정인데, 그간의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딸세포’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냈다. 디자인만 외부에 맡기고, 나머지는 내가 다 맡아서 한다.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도 진행했다. 현재 목표액을 400% 넘겼다. 10% 할인가로 선판매를 진행했는데 500부 정도가 팔린 상황이다. 초판으로 1000부 발간 예정이다. 드디어 5월 20일 책이 나온다.
-엄마와의 구술 과정은 어땠나.
=초반에는 자기 얘기 들려주기 싫다고 손사래 쳤다. 말도 뚝뚝 끊겼다. 앨범 사진을 꺼내 보며 엄마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었다, 처음엔 쓸쓸해하면서 먼 옛날 이야기하듯 하다, 어느 시점부터 현재 진행형으로 막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책은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이 한 축 이라면, 또 다른 한 축은 ‘관계’다. 여기에는 한 가족이 상처를 돌아보고 재해석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일 얘기 때 유독 눈 빛나며 기억 또렷
-오늘 잠깐 뵈었지만, 엄마 영선 씨는 쉽게 들뜨는 법이 없어 보인다. 그런 엄마를 활기차게 한 이야기 주제는 뭐였나.
=엄마는 일 얘기를 할 때 유독 눈빛이며 기억이 또렷했다. 40년 전 마산자유무역지역의 방직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할 적에 썼던 일본말이며, 30년 전 만화 가게를 운영하던 시절의 <흙바람> 같은 만화책 제목을 줄줄 읊어대고, 15년 전 출판물류센터에서 일할 때 자기 별명이 사전이었다며 본인이 맡았던 출판사명을 아직도 꿰고 있었다.
“나는 중학교 졸업하기 전에 10월부터 돈 벌러 나갔어. ‘건강모방’이라고 가내공업하는 모직회사야. 돈이 적고 주야간 2교대로 낮에는 13시간, 밤엔 11시간씩 일해야 해. 거기 한 2개월 다니다가 수출자유지구로 옮겼다. 임금 세다고 소문나고, 대우 같은 게 엄청 좋았지.”
-엄마 영선 씨는 10대 중반부터 노동자로 살았다. 가족을 위한 희생이었을까.
=엄마는 그 시절의 자신을 희생자로 생각하진 않는다. 일본계 회사 ‘에프원’에 다닐 때도 노조 대표로 나가서 이야기하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1975년은 마산에 방송통신고등학교가 생긴 첫해다. 회사 다니면서 방통고에 다녔다. 그리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 시절 이야기부터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노동’에 중점을 두고 엄마의 생애를 기록한 이유이겠다.
=엄마의 정체성을 ‘일하는 여성’에 두었다. 엄마는 자신이 건너온 노동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했다. 새마을과 산업화 시대의 시간을 촘촘하게 살아온 분이다.
-공장노동자부터 시작해 자영업자(만화방, 하숙집, 한복집)를 거쳐 출판물류 정직원에서, 닥치는 대로 비정규직까지. 엄마의 삶에서 여성 노동의 다양한 모습이 겹친다.
=엄마는 1970년대 공장노동자부터 2010년대 요양보호사까지, 40년간 저임금 노동자이자 집안의 무급 노동자로 살아왔다. 여성 노동의 살아 있는 역사다. 우리나라 여성의 일자리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서비스직은 30대까지만 가능한 실정이다. 40대가 되면 비정규직으로 불안정한 일밖에 할 게 없다. 엄마가 10년간 일했던 요양보호사는 50대가 상당수다. 아직도 요양보호사로 활동하는 엄마 친구들이 많다.
▶20대 시절의 엄마
딸로서 안전거리 확보가 가장 어려웠다
-구술 진행하면서 다투기도 했을 거 같은데, 어땠나.
=인터뷰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인터뷰어로서의 정체성보다 딸로서의 감정이 먼저 튀어나올 때가 많았다. 과거에 미처 표현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이다. 이것 또한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느그가 좀 크고 돈 잘 벌고 이래 되면 내가 돈 얼마 줬다 이런 말 나온다. 나는 그 말이 제일 듣기 싫은 거야. 도움은 내가 받았을지언정 느그한테 그런 말이 나오는 게 지금도 듣기 싫어. 그래서 누가 돈 준다고 해도 나는 도움을 절대 받기 싫어.”
-구술 진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대학 등록금 감당하느라 힘들었던 이야기 하며 투정을 좀 부렸다. 그랬더니 그게 마음이 쓰였는지 엄마가 요즘 자꾸 나한테 돈을 주려고 한다. (웃음)
-구술 진행하길 잘했다고 생각이 드나.
=엄마의 상처를 파헤친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은 된다. 어찌되었든 엄마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엄마에게 잘 살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그동안 그 말을 못 해줬다.
-엄마의 끝없는 노동을 바라보던 딸은 생각에 변화가 생겼을까.
=엄마에게는 40년 넘는 세월 동안 제 손으로 밥벌이해온 자로서, 근면한 노동자로서 지켜온 자부심이 있었다. 그간 나는 엄마를 연약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의 그녀는 훨씬 유연하고 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엄마더러 삶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해왔지만, 실은 지금껏 엄마를 무시해온 것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에 대해 내가 본 것만, 내 기준에서 판단했다.
▶독신주의자였다. 외할아버지가 따라다니며 결혼시키라고 해서 막차를 탔다. 근데 그게 똥였더라 ㅎㅎ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욕심을 덜 부렸더라면, 어디라도 일찍 취직했으면 엄마가 이렇게까지 병을 얻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 자책. 사람이 누울 자리 보고 뻗는다고 했다. 자식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자 그제야 온몸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엄마는 임금노동에서 강제로 은퇴하게 되었다.”
-많이 미안했겠다.
=고백하건대 그동안 엄마를 할퀴는 말을 가장 많이 한 건 나다. 아빠한테 당하기만 한다고, 소처럼 일만 실컷 하고 만날 남 좋은 일 시킨다고, 나는 엄마처럼은 안 살 거라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둥이를 나불댔다.
-엄마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니 무엇이 보이나.
=시대가 있고, 사회라는 게 있다. 지금도 여성에게 달린 가부장제의 족쇄가 이렇게 많은데 10년 전, 20년 전에는 그 족쇄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이제는 알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엄마가 먹여살렸는데>라는 책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내가 먼저 엄마를 제대로 알아주기로 했다. 그 시작은 제대로 된 호칭을 붙여주는 일이다. 엄마는 그간 가족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나 생계 부양자 같은 호칭은 남성에게만 명예롭게 주어졌다. 나는 여기에 대항해서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다고, 아니 살렸다고, 그녀의 노동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 엄마는 우리 가족의 생계 부양자였고, 진정한 가장이었다고 말이다.
“이야기를 100프로는 못했지만 속은 좀 시원하네.”
-엄마와의 구술 작업을 마치고 나서 가장 큰 심경의 변화가 있다면.
=고마움을 표현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죄책감이 옅어졌다. 애초에 내가 엄마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주제 넘는다. 내가 뭐라고? 엄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다. 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왔다. 처음부터 나는 엄마의 구원자가 될 필요도, 될 수도 없었음을 이제 와 깨닫는다.
-이제 엄마의 속이 다 보이나. (웃음)
=그 속을 딸인 내가 어찌 다 알까, 엄마가 팔순쯤 되면 그때나 온전한 속마음을 들려줄까 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대로 행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엄마가 바라는 것도 나의 행복이니까. 그래도 10년 뒤인 72세 때, 그리고 82세 때 또다시 엄마와 구술을 하고 싶다.
-이번 자서전은 당신이나 엄마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
=이 책은 엄마의 불완전한 자서전이며, 우리 가족이 상처를 함께 돌아본 첫 시도이며, 아직도 용서할 수 없는 아빠를 이해해보려는 걸음이기도 하다.
▶1970년대 마산자유무역지역에서 공장노동자로 일하던 시절, (왼쪽이 영선 씨)│김은화
제대로 못한 말 ‘진짜진짜 고마워’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친구로서 꼭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어딘가에 나 같은 딸이 있다면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놓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들 말하지만 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최상의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 아무리 피를 나눈 사이라도 서로를 대신할 수는 없다. 엄마에게는 엄마의 삶이, 나에게는 나의 삶이 있다.
“엄마, 내가 그 말을 제대로 못했네. 나를 키워줘서 고마워. 나는 정말 그리 생각한다. 엄마가 나를 먹여 살린 정도가 아니라, 살렸다고, 그때 엄마가 우리를 데리고 나가지 않았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진짜진짜 고마워….”
글 심은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