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라는 단어는 일말의 기대감을 주곤 한다. 다가오는 세대에 대한 크고 작은 바람이 생겨서다. 이를테면 차세대 선수, 이들이 국내 스포츠의 성장동력으로서 보여줄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안긴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수영 금메달리스트 김서영과 스케이트보드 동메달리스트 은주원도 그랬다. 신예 선수들의 당찬 경기력은 아시아 무대를 넘어 세계무대로의 도약을 꿈꾸기에 충분했다. 2020년 도쿄올림픽을 빛낼 스포츠 샛별들의 땀방울이 오늘도 한가득이다.
김서영
“최종 목표는 도쿄올림픽 차근차근 갈래요”
ⓒC영상미디어
“연지곤지를 찍었다.” 2018년 아시안게임 시상대에 오른 수영선수 김서영을 두고 국내 네티즌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태극기 양옆으로 일장기가 올라온 모습을 빗댄 것이다. 김서영은 지난 8월 22일(현지 시간) 여자 개인혼영 200m 결선에서 2분08초34로 1위에 올랐다. 앞서 치러진 개인혼영 400m에선 은메달을 따냈다. 김서영은 최근 2년 사이 자신이 보유한 한국 기록을 세 차례 경신하는 등 그의 상승세에 멈춤이 없다. 덕분에 박태환과 정다래 이후 이렇다 할 스타 수영선수의 부재가 채워짐과 동시에 한국 수영의 전망이 밝아졌다.
김서영은 아시안게임 이전부터 주목받아왔다. 2016년 리우올림픽 개인혼영 200m 준결승에 오른 데 이어 2017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대회 6위를 기록하면서 이번 아시안게임 메달권 가능성이 점쳐졌다. 예상은 현실이 됐다.
“꼭 금메달을 따야겠다는 각오보다 제 기록을 깨는 게 목표였어요. 메달에 연연하면 스스로 부담이 더해져서 욕심만 낼 뿐 오히려 좋지 못한 결과를 얻을 것 같았거든요. 터치패드를 찍고 전광판을 보고 나서야 1등을 한 줄 알았어요. 다시 떠올려도 그 순간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요.”
▶ 김서영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개인혼영 200m 결선에서 순위를 확인한 뒤 환호하고 있다. ⓒ연합
어느 승전보든 반가움이 앞서지만 김서영의 우승은 더 특별했다. ‘기초 종목 약세’라는 우리나라 스포츠계의 고질적 문제에 대한 우려를 조금이나마 덜어냈기 때문이다. 2020년 도쿄올림픽 수영에서도 메달 획득의 기대감을 높이는 대목이다. 김서영은 “‘수영 샛별’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셨는데 부끄럽지만 그것이 한국 수영에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저 감사하다”고 말했다.
수영을 시작한 건 다섯 살, 선수 생활은 열두 살 때부터다. 스스로 ‘기복이 심했던 선수’라고 말할 정도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부상이 잦은 탓에 세계대회 출전은 다른 사람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2009년 한창 컨디션이 좋다가도 이듬해 어깨 부상을 입으면서 목표로 하던 아시안게임이 물거품이 된 적도 있었다. 목표의식이 사라지니 운동해야 할 이유도 없어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이라는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개인혼영 200m 5위에 그쳤지만, 어깨 통증이 크게 줄고 부상 횟수가 적어지자 ‘다시 해볼 수 있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경기에 임하는 마음가짐부터 달리 가졌다.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해야 할까요. 이전에는 공언한 목표를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면 이젠 시합 자체를 즐겨요. 더 철저하고 더 완벽하게 연습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달리니까 자신감이 부담감을 이기더라고요.”
이번 아시안게임에선 평소 절친한 박태환 선수의 조언도 한몫했다. 일본 전지훈련 때부터 컨디션을 걱정하는 안부 연락과 더불어 자신감을 불어넣는 이야기를 해줬다고. 흔한 응원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지만 같은 선수이자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직접 건네는 조언이어선지 더욱 힘이 됐다고 떠올렸다.
김서영은 선수로서 강점을 ‘성실함’이라고 자부할 만큼 한결같다. 몸을 가누지 못할 수준이 아니라면 운동을 건너뛴 적 없는 건 당연하고 훈련시간보다 30분가량 먼저 도착해 준비한다. 자신만의 규칙으로, 이것을 지키는 것부터가 기록 경신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성실한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지난 흔적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자 선수 말예요. 훗날 누군가 저를 닮고 싶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김서영은 자신 말고도 유능한 선수들의 존재를 강조하기도 했다. 아시안게임에 함께 출전한 선수들을 비롯해 어린 선수들에게 꾸준한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선수층이 점점 얇아지고 있어요. 일본 수영 인구가 몇 만 명이라는데 우리나라는 2000명 정도밖에 안 돼요. 수영 종목 저변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에요. 선수층이 두꺼워야 경쟁이 늘고 더 좋은 기록을 낼 수 있거든요. 실업팀도 줄고 있어서 일부 선수들은 생계를 고민하다 수영을 그만두기도 하고요. 너무 안타까운 부분이죠.”
경험 면에서도 뒷받침됐으면 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다양한 국제경기를 뛸 수 있는 여건이나 외국 선수들과 함께 훈련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유명 선수들의 기량과 훈련 환경을 직접 확인할수록 더 나은 경기력의 바탕을 탄탄히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요즘 김서영은 10월 12~18일 전북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을 대비해 훈련에 한창이지만 최종 목표는 2020년 도쿄올림픽 메달리스트다.
“올림픽 무대가 궁극적인 목표예요. 그 무대로 향하는 길목에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대회가 있는 거고요. 한 다리 한 다리 차근차근 밟으면서 건너고 싶어요. 혹 노메달이 된다 해도 제가 올림픽에 도전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수많은 가치가 남을 거예요. 최선을 다하고 노력 없는 욕심은 내지 말아야죠.”
라이벌로 꼽히는 일본 오하시 유이 선수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저보다 좋은 기록을 가졌고 제 입장에선 쫓아가는 것”이라며 “도쿄까지 가면서 선의의 경쟁을 할 친구이자 라이벌”이라고 전했다.
선수이기 전에 스물다섯 살의 학생 김서영에게 여느 20대와 같은 일상을 포기해야 하는 아쉬움도 있을 터. 하지만 그는 “지금처럼 수영하면서 행복했던 적이 없다. 앞으로 기록이 점점 줄어들 상상만 하면 신이 난다”며 “모든 걸 하면서 원하는 걸 이룰 순 없지 않을까요”라며 웃어 보였다.
은주원
“대중에게 스케이트보드 제대로 알리고 싶어”
ⓒC영상미디어
‘드르륵, 파앗’ 스케이트보드 국가대표 은주원이 내는 날쌔면서도 둔탁한 소리에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온다. 지난 8월 29일 인도네시아 팔렘방 JSC 스케이트보드 경기장 위로 은주원이 날아올랐다. 보드를 난간에 걸친 채 내려와 완벽하게 착지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몇 초. 은주원은 이날 이 기술을 마지막으로 아시안게임 스케이트보드 남자 스트리트 부문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은주원은 이번 결선에서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최후 기술을 구사하기 직전까지 그의 순위는 7위였고, 이는 결선 진출자 여덟 명 중 끝자락이었다. 메달권인 3위 선수와도 6.9점 차이가 났던 터라 참가한 데 의의를 둘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때 믿기 힘든 광경이 벌어졌다. 은주원이 시도한 백사이드 360도 립슬라이드 기술이 제대로 먹히더니 그는 8.6점을 받고 단숨에 3위로 올라섰다.
스케이트보드 스트리트는 계단과 난간, 경사면 등 여러 구조물 안에서 선보인 기술에 매겨진 점수로 순위가 정해지는 종목이다. 총 일곱 차례 시기에서 성적이 나쁜 3개를 제외하고 나머지 점수를 합산한 것이 최종 득점이 된다. 은주원은 앞서 시도한 네 번의 베스트 트릭 가운데 세 번이나 넘어졌고, 마지막 시기에도 넘어지거나 낮은 점수를 받았더라면 하위권으로 대회를 마치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단념하고 있는데 코치님이랑 동료들 목소리가 들렸어요. ‘주원아, 할 수 있어’라는 엄청 큰 소리였어요. 멍해졌던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으니까요. 찰나의 순간 한국에서 보고 있을 가족,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나 이거 꼭 해낸다’고 결심했지만 막상 기술 할 땐 백지 상태였어요.”
대회 이후 한 달 넘게 흐른 지금도 자신이 메달리스트라는 게 온전히 실감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시안게임 직후 남원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치르느라 최근에서야 등교했다. 선생님과 학급 친구들이 준비한 축하 케이크를 보고서야 체감했단다.
은주원의 성적은 메달 획득 그 이상의 의미다. 스케이트보드는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첫 정식 정목으로 채택된 데 이어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도 정식 종목으로 치러진다. 때문에 이번 대회는 향후 국제대회에서 한국 스케이트보드 선수들의 잠재력을 가늠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은주원은 대표팀의 저력을 입증한 셈이 됐다.
“무조건 메달을 따는 게 목표였어요. 스트리트 문화, 취미 활동이었던 스케이트보드가 스포츠로 인식된 시간이 길지 않잖아요. 누구라도 메달을 따면 스포츠로서 이 종목을 각인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10대 소년이지만 스케이트보드 선수로서 가진 고민의 깊이는 성인 못지않다. 어떻게 하면 국내 스케이트보드의 저변을 넓힐 수 있을지, 보다 개선된 훈련 환경이 갖춰졌으면 하는 바람 등으로 고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빼놓지 않는 건 자신의 기량을 키우는 것이다. 어디서든 실력을 자부할 수 있는 선수가 되면 발전의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서다.
처음 스케이트보드에 오른 건 열두 살 무렵이었다. 약 5년 동안 미국에서 거주할 당시 우연히 길 위를 누비는 스케이트보더를 보곤 호기심이 생겼다. 그해 엄마가 생일선물로 주신 스케이트보드를 시작으로 어느 덧 6년이 지났다. 그 기간 선수 훈련이 이뤄진 건 아니며, 올 4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한 이후 본격적인 훈련을 받은 게 전부다. 국가대표 훈련 4개월 만에 메달리스트가 된 그에게 더욱 높은 평가가 내려지는 배경이다.
은주원에게 스케이트보드는 자는 시간을 빼곤 늘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존재다. 정식 훈련 시간이 아니더라도 매일 스케이트보드를 가지고 나서는 그다.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 끝에 주어지는 성취감, 짜릿함을 놓치기 싫단다.
“닮고 싶은 선수 중에 크리스 존슨리라고 있어요. 항상 남들보다 어려운 조건에 도전해서 놀라움을 선물해요. 저도 더 큰 목표를 두고 그것을 성공함으로써 누군가에게 가슴 벅참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국제대회에서 이제 막 발걸음을 뗀 그에게 2020년 도쿄올림픽은 새 목표이자 커다란 동기부여가 됐다.
“올림픽 메달도 따내야죠. 훨씬 치열한 경쟁이고 문턱이 높다는 것도 알지만 해낼 겁니다. 우선 그 전에 다음 달 중국 난징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도 최선을 다할 거고요.”스케이트보드를 이야기할 때면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던 은주원도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었다.
“롤(리그 오브 레전드)이라고 아세요? 저 그거 엄청 좋아하거든요. 아시안게임 때 현지에서 페이커(이상혁 e스포츠 선수)를 실제로 마주쳤는데 긴장돼서 혼났어요. 떨려서 말도 못 걸고 힐끔거리기만 했어요. 이번 대회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 중 하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