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훈이
‘역사 만화’ 펴낸 정훈이 작가
‘한국사’라고 하면 손사래부터 치는 이들이 많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왕조’와 ‘연도’ 위주로 고루하게 역사를 접한 탓도 있을 것이다. 임금에서 노비까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시대 살았던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갖가지 이야기로 역사를 만나볼 순 없을까.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사람 사는 이야기’를 뒤쫓다 보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도 보이지 않을까.
최근 발간한 <읽고 나면 입이 근질근질해지는 한국사>(생각의길)는 대부분 한국사의 큰 줄기에서 비켜나갔거나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 감춰진 뒷이야기에 주목한 만화 역사책이다.
책은 조선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미공개 이야기(비하인드 스토리)에 주목해 역사를 기존과 다른 시각으로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조선에도 블랙리스트 곡이 있었다’ ‘제사상은 원래 남자가 차리는 거라고?’ ‘조선 사람들의 최저임금은?’ 등 주제 하나하나가 역사를
‘재미있게’ ‘생동감 있게’ 만나게 해준다. 여기에 작가 특유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와 개성 넘치는 코믹한 캐릭터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수학은 빵점을 맞아도 국사는 만점을 받은 학창 시절을 보냈고, 고전 읽기와 번역, 역사
자료 수집이 취미인 역사 덕후’. 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만화가 정훈이 씨다. 20년 넘게 영화 잡지 <씨네21>과 <청년의사> 신문에 만화를 그리고 있고, <공감>에 2년 가까이 ‘이슈를 품은 역사 이야기’를 연재한 그를 <공감>이 만나봤다.
<공감> 연재 끝내고 코로나19로 ‘집콕 생활’
-이번 책에는 <공감>에 연재했던 ‘이슈를 품은 역사 이야기’ 콘텐츠도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감> 독자들과 만남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질 것 같은데요. 독자들에게 인사 부탁합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공감> 연재를 끝내고 독자로 돌아온 지 이제 여섯 달이 돼가는군요. 이 책은 연재에 담았던 이야기와 연재 당시 이슈와 연관성이 별로 없어 미처 선보이지 못했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책을 많이 파는 작가가 아니어서 기념품 삼아 만든 책인데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도 기념품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화가로서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도 궁금합니다.
=평소 연재하는 원고 마감하느라 늘 정신줄 놓고 살고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행하는 <카툰 공감>에 ‘이달과 역사’라는 만화를 새로 그리고 있습니다. 2019년 말 <공감>에서 ‘이슈를 품은 역사 이야기’ 연재를 끝낸 뒤 이번 책도 다 완성하고, 모처럼 여유가 생겨서 여행을 가볼까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집콕’을 했습니다. 원래 ‘자가격리’ 인생이라 힘들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내심 섭섭하더군요. 하하.
-<읽고 나면 입이 근질근질해지는 한국사>는 어떤 책인가요? 지은이 입장에서 간단히 소개해준다면요.
=조선시대 역사에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꾸며진 책입니다. 텔레비전 사극 등에서 그려진 정형화된 조선시대 모습과는 다른 선조들의 뜻밖의 삶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공감> 연재 당시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매주, 그것도 ‘역사’를 소재로 만화 작업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작가에게 이 연재는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특히 더 중점을 둔 점은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매주 쏟아지는 이슈와 관련 있는 역사 속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이라 재미있기도 했지만, 아찔한 순간도 참 많았습니다. 대통령 해외 순방이나 기념식 행사 등 일정이 예정된 사건은 자료를 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간혹 돌발적인 이슈이거나 관련성 있는 역사적 사실을 찾아낼 수 없을 때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정부 발행 매체이다 보니 최대한 고증에 신경 써야 했고, 시비나 반론에 대비해 출전 등의 자료를 확실히 보관해야 한다는 데 가장 중점을 두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옛날이야기 듣고 역사책 읽기 좋아해
-역사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진 건가요?
=어릴 때부터 옛날이야기를 듣거나 역사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20년 전 즈음 한 자동차 회사의 사외보에 한국사에 숨겨진 이야기를 주제로 만화를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편집자가 자동차 이야기만 빼면 아무 주제나 괜찮다기에 제가 좋아하는 역사 이야기로 연재를 시작했죠. 그때부터 습관적으로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잘 모아둔 이야기를 <공감> 연재 때 곶감 빼먹듯 꺼내서 만화로 ‘요리’했는데 주간지다 보니 곶감을 꽤 많이 빼먹었더라고요.
-책을 보면 “전생에 연구원이었는지 남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아주 깊이 파고들어서 혼자서 디테일을 추구하며 만족하는 성향이 있다”고 썼던데요. 이 디테일한 역사적 사실들은 어떻게 찾은 건가요?
=조선사는 자료가 방대합니다. 남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야기라 해도 우리 조상들은 아주 많은 것을 기록해두었습니다. 저는 평소 고전 읽기가 취미입니다. 역사책을 단순히 읽기만 하기보다는 관련 자료를 찾아서 데이터베이스화해둡니다. 많이 읽고, 검색하고, 자료를 잘 모으는 것이 답일 겁니다.
-우리의 긴 역사 가운데서 특별히 ‘조선시대’에 주목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조선시대 이야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자료가 풍부하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아직도 새로이 알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공감>에 2년 가까이 연재한 ‘이슈를 품은 역사 이야기’
조선 역사에도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모험이
-‘조선시대에도 가짜 뉴스가?’ ‘조선시대에도 전세를 살았다고?’ ‘떴다떴다 조선 비행기’ 등 흥미진진한 주제가 참 많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조선시대 역사 속 인물이나 사건이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승총명록(勝聰明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숙종~영조 때 경상도 고성현에 살던 재지양반 구상덕이 37년간 써온 일기장이죠. 당대에 살았던 사람의 생활을 담은 일기이다 보니 그 시대 사람의 삶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 부모님의 고향이 고성이라 일기장 속의 장소들도 눈앞에 더 쉽게 그려지더군요. 이 책에도 두세 번 언급되었습니다.
-“취미로 역사를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면 뇌에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분출해 격하게 흥분한다”는 언급이 있더군요. 책에서 작가의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을 분출하게 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면요.
=성종대에 조선 조정이 미지의 섬 삼봉도를 찾기 위해 수군 탐험대까지 동원해 대소동을 벌인 이야기입니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모험(어드벤처)이 조선 역사에도 있었다는 게 참 흥미로웠죠.
-‘역사는 재미없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만날 수 있을까요?
=저는 지리를 좋아합니다. 지도책이나 지형도를 보면서 ‘사람들은 왜 여기에 모여 살았을까’ 등을 연구하는 것이 재미있고 옛 지도와 오늘날 지도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는 저만의 비법이자 즐거움이고요. 역사책을 애써 읽으려 하기보단 각자 흥미와 재미를 느끼는 주제를 놓고 그것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여행이죠. 가족과 함께 역사를 주제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습니다.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서로 토론도 하면서 말이죠.
-만화 작업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궁금해하는 팬도 많습니다.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뉴스도 보고 기사도 읽습니다. 그러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검색해서 찾아보고요. 인터넷을 정처 없이 떠돌다 보면 사소한 것이라도 일단 머리에 남는 게 있습니다. 그렇게 남았던 것들이 작업할 때 언뜻 떠오르는 거죠. 그런 조각들이 모여 만화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림은 빨리 그리는 편입니다. 콘티 작업이나 스케치 등은 따로 하지 않고 태블릿으로 바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이 성의 없어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단점이기도 한데, 콘티나 스케치 과정을 거치다 보면 만화의 재미가 떨어지더군요.
사람 냄새 나는 만화 많이 그리고 싶어
-‘내 만화에는 반드시 이것만큼은 있어야 한다’ 등 주제와 소재를 막론하고 만화 속에 일관되게 담는 철학이 있나요?
=그건 바로 ‘사람’입니다.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다가도 결국에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집니다. 작가로서 아주 좋은 습관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사람 냄새 나는 만화를 많이 그리고 싶습니다.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머릿속에 박제되어 있는 우리 역사를 한 번쯤 지워버리고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의 평가도 극과 극으로 나뉘는데 하물며 역사 속 인물들은 오죽하겠습니까. 현대인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선조 임금도 ‘목릉성세(穆陵盛世)’의 군주로서 조선 사람들의 평가는 현대와 사뭇 다릅니다.
김청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