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은 세계 인구의 24억 명이 주식으로 먹는 세계 3대 곡물이지만, 국내에서는 그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소비량이 매년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양곡소비량조사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61.8㎏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1980년도 쌀 소비량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수치다.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은 169.3g. 밥 한 공기를 90g으로 보면 하루에 두 공기도 먹지 않는 셈이다. 흰 쌀밥 대신 간편식이나 샐러드, 빵을 주식으로 삼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밥심으로 산다’는 건 옛말이 됐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내년도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60㎏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정부가 1인당 연간 소비량을 60㎏ 아래로 추정한 건 사상 처음이다. 서글픈 처지에 빠진 쌀에게 마음을 주는 이가 있다. ‘왠지 특별해지고 싶은 순간’을 돋보이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생긴 브랜드, ‘왠지’다. ‘왠지’가 특별한 이유는 그 소재 때문이다. ‘왠지’를 만든 김효정 작가는 대한민국 1호 ‘쌀 아트 주얼리 작가’다.

▶ 국내 1호 쌀아트 전문가, 김효정 작가 ⓒ김효정
“전공은 동양화였어요.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았죠. 어느 날 어머니가 저녁밥을 준비하시면서 쌀을 씻고 계셨는데, 쌀 한 톨이 튀어 어머니한테 붙었어요. 그 모습에 영감을 받았죠.”
쌀을 이용해서 장신구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그렇게 시작됐다. ‘쌀 소비가 부진하다’는 신문 기사도 마음에 걸렸다. 한국의 전통색인 오방색을 쌀 위에 입히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한 톨 한 톨 일일이 염색하고 붙여서 장신구로 만들어내기까지는 눈이 뻑뻑해지고 허리가 지끈지끈해지는 노고가 필요했다.
“눈에 핏줄이 터져서 병원도 오래 다녔어요. 쌀을 길러내는 농민들의 수고가 절로 생각나더라고요. 그분들의 정성에 부끄럽지 않은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금방 지은 고슬고슬한 밥 같은’, 가장 한국적이고 따뜻한 아름다움을 담고 싶었습니다.”
쌀이라는 작은 알갱이에 황·청·백·적·흑색의 오방색을 입히는 과정에는 시행착오가 많았다. 원하는 색을 얻기까지 숱한 실패가 있었다. 햇빛에 노출되면 색이 바래기도 했다.
“작업을 할 때는 쌀이 움직이다 보니 핀셋으로 계속 고정해야 해요. 미세한 떨림에도 쌀의 위치나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에 섬세함이 필요해요. 지금은 세 차례 염색 과정을 거쳐 가공해서 색을 보존하는 법을 터득했어요. 쌀 한 톨 한 톨을 쌓아올리는 과정은 꼼꼼한 수작업으로 이루어져요.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리는 편입니다.”

▶ 쌀 주얼리 브랜드 ‘왠지’에서 만든 쌀 귀걸이 ⓒ김효정

▶ 김효정 작가는 쌀알에 오방색을 입혀 각기 다른 모양을 만들었다. ⓒ김효정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작품 수는 스무 개를 넘지 못한다. ‘쌀 하나도 같은 쌀은 없기에’ 대량생산으로 만들기보다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과 면담을 거쳐 100% 주문 제작으로 진행한다. 제품 이름도 순우리말에서 따온다. 단미, 온새미로, 한울, 그린나래 등이 그렇다. 단미는 ‘달콤한,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의 우리말이고, ‘온새미로’는 ‘가르거나 쪼개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변함없는 모습’을 뜻한다. 일일이 우편으로 보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어느새 전국에 단골도 생겼다. 전시회나 플리마켓을 꾸준히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
“흔하지 않은 주얼리이다 보니 선물용으로 찾는 분들이 많아요. 연령에 구분 없이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요.”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왠지’는 부산시에서 주최한 창업자 워크숍에서 우수창업자로 선정되면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은 농림축산식품부와 함께 2016년부터 쌀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젊은 창업인 5명을 발굴하는 ‘미(米)스코리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김효정 대표의 ‘왠지’가 선정됐다. 김효정 작가는 부산에서 작업실을 열고 작품을 만들고 있다.
“전국에서 주문이 많아져서 사무실을 좀 더 큰 곳으로 이전하고, 홈페이지도 만들 예정이에요. 서울 인사동에 매점도 입점하게 돼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쌀주얼리의 매력을 알 수 있었으면 해요.”
매일 아침 시장 문이 열리면 김효정 작가는 쌀가게에 들른다. 곡물마다 다른 색깔과 질감을 공부한다. 녹두와 보리, 찹쌀과 조도 새로운 소재가 될 수 있다. 쌀에 관심을 갖는 젊은 작가는 상인들에게도 환영받는다. 작업실 안에는 농민들이 보내준 쌀도 있다.
“농민분들도 처음 작품을 보시면 ‘이게 쌀이라고?’ 하면서 놀라세요. 어떤 분은 재료로 쓰라면서 직접 쌀을 가져다주시기도 했어요. 쌀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제가 느끼는 보람도 커요. 그래서인지 사용하는 쌀의 종류도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흑미나 찹쌀, 조나 콩을 넣어주면 작품 속에서 포인트가 되거든요. 현재 사용하고 있는 곡물은 40가지 정도 돼요.”
김효정 작가는 작품 활동뿐 아니라 쌀 홍보에도 힘을 쏟고 있다. 부산농업기술센터에서 ‘쌀 소비 촉진’을 위한 강의도 맡고 있다.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쌀이 점점 잊혀가고 있는 것 같아요. 식생활에서 잊힌다면 다른 분야에서 충분히 쌀을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쌀주얼리 장르가 더 보편화되면 새로운 관심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요?”

▶ 한복용 소품으로도 쌀아트 제품이 인기다. ⓒ김효정
강의나 홍보 활동이 있을 때 김효정 작가는 한복을 입는다. 한복 차림에 쌀아트 귀고리나 반지, 브로치를 하면 한복과 잘 어울린다.
“곡물이 가진 둥근 곡선이나 오방색의 조화가 한복과 썩 잘 어울립니다. 쌀알을 이용해서 꽃모양을 만들면 한복뿐 아니라 일상복에도 잘 어울리는 주얼리가 되고요.”
김효정 작가는 쌀주얼리 브랜드가 쌀의 소비를 촉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쌀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면 생활 곳곳에서 쌀을 친숙하게 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쌀작가라는 타이틀도 좋지만, 우리 쌀을 홍보하고 한국의 미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쌀 축제나 박람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념품이 될 수 있도록요.”
쌀에 담긴 동양미, 오방색과 곡선의 조화
김효정 작가의 가족은 모두 예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아버지가 사진작가였던 게 어린 시절에 영향이 컸던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부산에 있는 작업실은 남동생과 공유하고 있다. 남동생은 안전벨트를 재활용해서 가방이나 벨트, 앞치마를 만드는 ‘업사이클링 작업’을 하고 있다. 서로의 작업에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제1호 고객이 되어주기도 한다.
“처음부터 예술 분야에 정착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직장생활을 5년 넘게 했는데, 회사를 나온 뒤 배낭여행을 한 게 계기가 됐어요. 프랑스와 터키 등 서유럽 6개국을 다녀왔는데 각 나라에서 느낀 점은 고유의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한국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생긴 시점이었다. 특히 반 고흐를 테마로 한 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그가 살던 곳과 작업실에 들른 경험은 김효정 작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고흐도 고흐였는데, 당시 가이드를 한 분이 20대 한국인이었어요. 고흐가 좋아서 거기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좋아하는 일을 행복하게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내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신라대학교 미술학과 3학년으로 들어갔다. 동기들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작업을 하는 동안 전에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느꼈다.
“한 번 앉으면 완성할 때까지는 끝을 보는 편이에요. 그런 고집이 없었으면 쌀아트를 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김효정 작가가 쌀아트를 시작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몇 톨밖에 안 되는 쌀 장신구로 쌀 소비를 늘릴 수 있느냐”는 핀잔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물리적인 양은 늘어나지 않을 수 있어요. 다만 쌀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킬 수는 있죠. 예를 들어 쌀 박람회에서 다양한 품종의 쌀을 만져보고 밥을 지어보고, 쌀농사 과정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한 뒤 한편에 쌀로 만든 작품들이 있다면,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되지 않을까요?”
‘주얼리’ 하면 떠오르는 건 보석이다. 금이나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처럼 화려하고 영롱한 것들이다. 그에 비하면 쌀은 순하고 연하다. 김효정 작가는 까만 원석 대신 흑미를, 금 대신 귀리를, 다이아몬드 대신 곡물을 쓴다.
‘밥심’은 꼭 먹을 때만 생기는 건 아닌지도 모른다. 농부의 수고가 담긴 쌀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 한 알도 허투루 버려지지 않고 반짝반짝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고운 마음이 올해의 米스코리아 ‘왠지’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