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 伊 오페라 페스티벌 연출 안주은
지난 8월 3일 이탈리아의 권위 있는 페스티벌인 ‘마스카니 페스티벌(Mascagni Festival)’ 현장. 영화 ‘대부’의 OST에 맞춰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무대 위에 등장한 한국인 무용수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빠른 템포의 서양음악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동양의 춤선에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앞서 7월 27일 ‘산 지미냐노 국제 페스티벌’에서도 같은 장면이 연출됐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두 페스티벌은 이탈리아와 한국에서 올해 특히 화제를 모았다.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한국인이 페스티벌의 총연출을 맡았기 때문이다. 한국인 최초다. 현지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오페라 연출가 안주은이 그 주인공이다.
올해 두 페스티벌은 특별하게 한·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진행됐다. 행사의 연장선으로 지난 9월 20일에는 ‘세계가 하나 되는 울림’을 주제로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도 공연이 펼쳐졌다. 마스카니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이자 지휘자인 마리오 메니칼리와 연출자인 마르코 볼레리, 알베르토 프로페타를 초청해 무대를 꾸몄다. 국내 출연진으로는 세계 4대 오페라 음악 총감독 겸 베하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예술 총감독인 지휘자 김봉미를 비롯해 박성희, 조현애, 이동명, 임희성 등 정상급 성악가와 오케스트라, 합창단 등 180여 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했다. 안 연출가는 “민간 국제문화교류 활성화 취지에 부합하는 특별한 공연이었다”며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2025년에는 스페인, 영국과의 다양한 문화예술적 교류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안 연출가는 이탈리아 아레나 아카데미 최고 연주자 과정과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국립음악원을 졸업하고 체코 브르노 국립음악원에서 뮤지컬을, 미국 헤필드 대학교에서 무대연출로 박사 과정을 마쳤다. 이후 국내외에서 오페라 ‘마술피리’, ‘투란도트’, ‘박쥐’, ‘라트라비아타’, ‘아이다’, ‘카르멘’, ‘세빌리아의 이발사’ 등 400여 작품의 연출을 맡았다. 2008년 모스크바 국제 연출 콩쿠르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연출가로서 국제무대에서도 인정받은 그가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11월 이탈리아 시칠리아 오페라극장에 연출가가 아닌 배우로 무대에 오른다. 어린 시절 품었던 성악의 꿈을 놓지 않고 틈틈이 레슨을 받아왔는데 노력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끊임없이 도전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안 연출가를 만났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오페라의 성지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대표 페스티벌에 한국인 최초로 총연출을 맡으며 지난여름을 뜨겁게 보냈다.
이탈리아는 오페라와 클래식의 뿌리를 가진 도시다. 한국인 연출가로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국립무용단 무용수인 박기환을 초청했다. 한국의 미·의상·움직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케스트라에도 한국무용이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시도였다고 본다.
반응은 어땠나?
4분 30초 안에 한국무용으로 오페라 한 편을 펼쳐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한국무용은 처음인데다 빠른 템포의 음악에 느림의 미학이 어울릴 수 있다는 점에 모두 놀라워했다.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한국무용이 서양악기와 어우러지며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이번 공연의 성과라고 본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인인 안 연출가를 총연출 자리에 세울 때 어떤 점에 주목했을까?
나의 에너지와 열정을 높이 산 것 같다. 연출을 처음 배울 때부터 스승에게 ‘책상에서 펜대만 굴리는 연출가는 죽은 연출가나 다름없다’는 말을 들었다. 연출가가 가수들 앞에서 광대가 될 때 가수들이 관객들 앞에서 광대가 될 수 있다. 연습할 때도 자리에 앉은 적이 없다. 내가 먼저 보여주고 따라오도록 돕는다. 가수가 진정성 있게 연기하고 노래할 때 관객도 즐거움을 느낀다. 오페라는 그래야 한다. 그 믿음 하나로 지금의 자리에 있다.
대학에서 성악을 배워 크로스오버 가수로도 활동했다. 성악을 하다가 연출로 전향한 계기가 있나?
나는 끼와 열정이 많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도 좌절의 시기가 있었다. 러시아에서 공부하던 중 결핵과 폐렴에 걸려 코마 상태로 2개월 정도 지냈다. 그때 목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다. 다신 노래를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대학로에서 무대 연출을 배웠다. 6개월 동안 소극장의 조연출로 일하며 새로운 매력을 느꼈다. 무대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면 연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러시아에 있는 오페라극장에 취직해 정식으로 연출가의 길을 걸었다.
안 연출가는 파격적인 오페라 무대를 연출해왔다. 부산에서 공연했던 오페라 ‘박쥐’는 클럽버전의 일렉트로닉한 무대로 풀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페라도 어렵지 않고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시도를 많이 했다. 뮤지컬보다 재밌는 오페라로 문턱 높은 오페라 공연의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클럽DJ의 라이브 공연과 폴 댄서, LED조명 등 기존 오페라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볼거리로 무장했다. 관객들은 너무 좋아했지만 음악계에서는 싸늘한 반응이었다. 2~3년 동안 나를 찾지 않더라. 그동안 갈고닦으며 실력을 쌓았다.
그동안 연출해온 작품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을 하나 꼽는다면?
가장 ‘안주은답게’ 연출한 작품은 ‘투란도트’다. 음악에 드라마를 입혀 뮤지컬처럼 선보인 작품이다. 차가운 공주 ‘투란도트’가 ‘칼라프’ 왕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 단순한 드라마를 여주인공의 결핍에 초점을 맞춰 드라마로 풀어냈다. 원작이 갖고 있는 비극적 요소와 로맨틱한 해피엔딩을 최대한 섬세하게 결합시키는 데 중점을 뒀다. 관객들이 푸치니의 음악을 극적 요소들과 함께 좀 더 편안하게 감상하는 무대가 되길 바랐다. 성악가들 역시 극에 몰입해 ‘오페라 가수’가 아닌 ‘오페라 배우’가 돼줬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무대였다고 자평한다.
오페라 연출가로 누구보다 우리나라 오페라의 대중화에 앞장서왔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오페라 ‘마술피리’를 각색해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어린이들이 좋아할 캐릭터를 앞세워 50분 동안 한국어로 공연했다. 오페라 가수는 물론 뮤지컬 배우를 동원해 연기적인 부분을 채웠다. 오페라의 형식과 본질은 지키면서 연출과 안무, 연기 등의 양념을 넣어 이질감 없이 만들었다. 관객들도 좋아했다. 나의 모토는 ‘내 아이가 처음 보는 오페라는 즐거워야 한다’다. 아이들이 흥얼거릴 수 있는 오페라를 시도해보고 싶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 오페라가 더는 어렵지 않은 친숙한 장르가 될 것으로 본다. 아이들부터 어른들에게까지 클래식 문화가 활성화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오페라에 대한 진입장벽이 높다. 오페라의 대중화를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문화가 오랜 시간 이어져왔다. 클래식 음악을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하고 크고 작은 음악 공연이나 오페라를 자주 관람하면서 그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가 정착됐다. 한국에서도 우리들과 밀접한 소재로 좀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가 지속적으로 생겨난다면 충분히 대중화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한국은 여전히 보수적이다. 소극장에서는 많은 시도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원이 부족해 질적인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 문화를 깨기 위해서는 후원과 기부 문화가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 또한 시대 흐름을 읽는 것도 중요하다.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연말은 어떻게 보낼 계획인지.
11월에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있는 오페라극장에서 배우로 무대에 오른다. 오페라 연출을 하던 중에 성악 레슨을 받았는데 시칠리아 극장장이 내가 연습하는 모습을 보더니 ‘소리가 좋은 데 왜 노래를 안 하나. 지금 나이가 가장 꽃 필 나이’라고 말하며 무대에 서보라고 권했다. 새로운 도전이 너무 즐겁다. 앞으로의 나의 삶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기대된다.
안주은 연출가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이고 싶나?
안주은은 ‘열정적이다’라는 말이 듣고 싶다. 늘 새로운 시도를 하며 누군가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일을 할 때 거침이 없다. 실력으로 보여주면 된다. 앞으로도 ‘안주은다운’ 공연을 펼쳐가고 싶다.
서경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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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