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파리하계패럴림픽 휠체어 펜싱 국가대표 조은혜 선수
“제가 주인공인 영화의 제목은 ‘길’이에요. 길이라는 단어는 뜻이 열려 있잖아요. 좋은 방향성을 제시할 수도 있고요. 포스터도 구상해놨어요. 넓게 펼쳐진 바다를 배경으로 길이 나 있고 그 길에 휠체어에 앉은 제가 있어요. 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서 포스터에는 뒷모습이 실려 있죠. 상단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어요. ‘그대로 자리에 머물 것인가 무대에 나가서 춤을 출 것인가의 갈림길에 섰을 때 당신이 춤을 췄으면 정말 좋겠다.’ 제가 좋아하는 오프라 윈프리의 책에서 본 글귀예요.”
본인이 주인공인 인생 영화를 만든다면 어떻게 그리고 싶은지 기자가 건넨 마지막 질문에 휠체어 펜싱 국가대표 조은혜 선수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한 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 내용 중 마지막 질문과 답을 제일 먼저 소개한 데는 이유가 있다. 조 선수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느껴져서다. 2017년 불의의 사고로 척수 손상을 입어 하반신 마비가 된 조 선수는 2018년부터 휠체어 펜싱 선수로 멋지게 새로운 인생을 펼치고 있다.
2024 파리하계패럴림픽을 눈여겨봤다면 알 법한 인물, 조 선수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하얀색 국가대표 유니폼을 갖춰 입은 모습에서 선수 특유의 단정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아직 패럴림픽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는 그는 정부에서 마련한 선수단 환영 만찬 등 여러 행사에 참석하고 개인 훈련에 집중하면서 컨디션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2022 항저우장애인아시안게임, 2023 전국장애인체전 등 각종 대회에서 꾸준히 성적을 낸 그에게 이번 패럴림픽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아쉽게 메달을 목에 걸지는 못했지만 생애 첫 도전에서 동메달 결정전까지 진출했다.
동시에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가 1000만 관객을 동원한 ‘범죄도시’의 분장팀장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패럴림픽이 열리기 직전 영화를 함께 작업했던 진선규, 마동석 등 배우들은 개인 누리소통망(SNS)에 조은혜 응원 영상을 남기며 눈길을 끌게 만들었다.
생애 첫 패럴림픽을 치른 소감부터 듣고 싶다.
역시 올림픽 무대는 감회가 달랐다. 처음 경험하는 것이다 보니 많은 감정이 올라왔다. 설레기도 하고 들뜨기도 하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낯설었다. 긴장과 설렘의 중간 어딘가에 묘하게 있다고 할까. 말을 하다 보니 다시 설렘이 느껴진다(웃음).
이번에 휠체어 펜싱 종목의 존재감이 컸다.
자력으로 패럴림픽 쿼터 출전권을 따서 참가한 것은 12년 만에 처음이었다. 여자 선수 3명이 출전했고 덕분에 오랜만에 단체전에도 나가서 좋은 분위기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권효경 선수가 28년 만에 메달을 딴 것도 너무 기쁜 일이다. 많은 분들이 현지에서 선수들의 컨디션을 위해 여건을 잘 만들어준 덕인 것 같다.
4등은 좋기도 하지만 아쉬운 등수이기도 하다. 개인전 결과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플뢰레B 동메달 결정전이 끝나고 정말 많이 아쉬웠다. 4년 동안 나름 열심히 준비했는데 내가 너무 큰 결과를 바란 건지, 욕심이었는지,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된 건지 등 정말 여러 생각이 들더라. 너무 힘들었다.
어떻게 마음을 다잡았나?
다행히 금세 초긍정 마인드가 발동됐다. 이 값진 무대의 경험을 다시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였고 2년 뒤, 4년 뒤 메이저급 대회가 기다려지고 설?다. 스스로 위로를 하며 다잡았던 것 같다.
그런 초긍정 마인드는 선수 생활을 하면서 생긴 건가?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긴 했는데 다치고 나서 그런 성향이 더 강해졌다.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내가 가진 생각이 말과 행동으로 나오지 않나. 생각을 잘 다룰 줄 알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큰 역할을 해준다. 종이 한 장 차이의 생각이 전혀 다른 길로 이끈다.
선수로서 굉장히 큰 장점으로 발휘될 것 같다.
그게 나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내가 그때 왜 그랬지’라는 생각을 하면 안 좋은 생각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럴 때 냉정하게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눈에 보인다. 내 자신에게 자꾸 질문을 하면 답이 나오게 돼 있다. 그때 다시 목표를 정하고 플랜을 짜면 된다. 다시 심장이 뛰고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들이닥친 사고와 장애도 그렇게 받아들였나?
낙상사고를 당하고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는 말도 못했다. 자존감, 자신감은 바닥을 쳤고 무기력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암울했다. 수술하고 병상에만 한 달 가까이 누워 있다 보니 근육이라는 근육은 다 빠지더라. 그때 30대 초반이었는데 생각의 전환을 했다. 어차피 죽을 거 아니니까 빨리 정신을 다잡자고 스스로 질책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했다. 하고 싶은 것, 해야만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은 다르지 않나.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걸 계속 찾았다.
그게 휠체어 펜싱이었나?
시작은 체력관리였다. 장애인 스포츠가 뭐가 있는지 알아보다가 시작하게 됐다. 어느 날 병원에서 9시 뉴스를 보는데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하얀 도복을 입은 휠체어 영상이 나왔다. 보자마자 매료됐다. “아, 저거다!” 너무 멋져보였고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휠체어 펜싱 종목 정보를 찾아봤는데 알면 알수록 매력 있더라. 당장 대한장애인 펜싱협회에 연락해서 휠체어 펜싱을 경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문의했다. 다음날 감독님이 병원으로 오셨다. 그땐 내가 근육도 많이 빠지고 너무 말랐었다. 감독님이 버틸 수 있겠냐면서 자꾸 다른 종목을 경험해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나를 더 자극시켜 여기까지 오게 됐다.
알려진 대로 영화인 출신 아닌가. 전혀 다른 일을 하다가 운동을 한 소감은 어떤가?
처음부터 국가대표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허리 사용이 많은 운동이 재활에 좋겠다 싶어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점점 좋아졌다. 나에게 승부욕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경기에서 이기면 즐거워하고 성취감을 느끼고 있더라. 몰랐던 나 자신을 알아가면서 점점 더 펜싱에 빠졌다. 일주일에 한두 번 하던 것이 서너 번이 되고 어느 날 보니 100% 펜싱인이 돼 있었다. 좋아하는 친구들과의 약속에도 안 가고 훈련을 반복했더니 성적이 계속 따라왔다.
누구나 갑자기 사고를 당하기도, 슬럼프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나 조언이 있다면?
생각의 차이가 변화를 부른다. 한 끗 차이다. 과거 안 좋았던 것에 집중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더 관심을 갖고 대화를 많이 하길 권한다. 그러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어떻게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지 빠르게 알 수 있다. 개인적인 루틴인데 다이어리나 하얀 종이에 지금 내 기분을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들을 모두 적다보면 거기서 내가 우선적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 보인다. 새롭게 머릿속이 정리되고 마음이 하나씩 비워지고 채워진다.
본인에게 휠체어 펜싱은 어떤 존재인가?
정말 재미있는 운동, 그리고 개인적으로 감사한 대상이다. 휠체어 펜싱을 통해 장애를 가진 후 적극적으로 사회에 나올 수 있었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도 휠체어 펜싱을 통해 얻었다.
다음 행보는 뭔가. 선수로서의 목표는?
내년에 전북 익산에서 휠체어 펜싱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린다. 그다음엔 2026 나고야아시안게임, 2028 로스앤젤레스패럴림픽이 있다. 다가오는 대회를 하나씩 ‘도장 깨기’ 하면서 계속 보완하고 노력하려고 한다. 파리패럴림픽에서 애국가를 울려 퍼지게 하는 게 목표였는데 이루지 못했다. 변함없는 목표는 시상대에 올라 애국가를 울리는 것이다. 어느 대회건 태극기를 가장 높게 올리고 싶다.
선수가 아닌 인간 조은혜의 꿈도 궁금하다.
대표팀에 들어간 다음 충남 홍성에서 합숙훈련을 한 적이 있는데 영화 지방촬영을 할 때 묵었던 숙소더라. 2년 만에 같은 장소에 전혀 다른 상황, 다른 역할로 와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미묘한 감정이었다. 내 자리에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영화 현장을 잊어본 적은 없다. 다시 현장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작게나마 영화인이 되는 것이 버킷리스트에 있다. 일단 지금은 운동에 집중하고 그 꿈은 좀 더 나중에 이루고 싶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 편의 영화 같은 인생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어떻게 그리고 싶나?
엔딩도 좋지만 과정이 의미가 있다. 장애를 입기 전에는 장애인에 대해 너무 몰랐다. 관심이 없었으니까. 이제는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엔딩이 어떨지 알 수는 없지만 남은 스토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도전과 여정으로 채우고 싶다.
임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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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