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최초 밴 플리트상 수상 박세리
2016년 10월 인천 영종도 스카이72GC에서 열린 ‘골프 전설’ 박세리의 은퇴식을 취재 차 방문했었다. 국내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KEB 하나은행 챔피언십 1라운드를 마지막으로 골프 무대를 떠나는 그를 위해 대회 주최 측과 팬들이 은퇴식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골프와 함께 눈부신 시간을 보낸 박세리의 마지막은 멋있었다. 그를 향한 뜨거운 박수는 한국 골프의 한 챕터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는 듯했다. 내내 “행복하고 감사하다”던 박세리는 따로 마련된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내 자리를 잘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아널드 파머처럼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선수가 되고 싶다”면서 “골프를 발전시키고 골프를 사랑하고 골프의 꿈을 가지고 있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겠다”는 말도 남겼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0월 22일 오후 한국 여성 최초로 밴 플리트상을 수상한 박세리 바즈인터내셔널 공동 대표 겸 박세리희망재단 이사장(이하 대표)을 만났다. 인터뷰를 앞두고 그의 은퇴식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밴 플리트상 수상이 그가 은퇴 당시 남겼던 스스로의 다짐을 잘 지켜내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존경받는 사람’이자 ‘골프 발전과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겠다는 다짐 말이다.
밴 플리트상은 미국의 비영리단체 코리아소사이어티가 주관하는 상이다. 1992년부터 매년 한미관계 증진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한다. 올해는 박세리 대표와 윤윤수 휠라홀딩스 회장이 공동 수상했다. 역대 수상자로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등이 있다. 한국 여성이 이 상을 받은 건 박 대표가 최초다.
LPGA 투어 25승,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 헌액, 미국골프협회(USGA) 밥 존스상 등 선수 시절 대단한 기록을 남긴 그는 은퇴 후 매년 미국과 한국에서 주니어 대회를 개최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올해부터는 한국 선수 최초로 본인의 이름을 내건 LPGA 투어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밴 플리트상은 그가 단순히 ‘한국 골프의 살아 있는 전설’이기 때문이 아니라 은퇴 이후 사업가, 방송인, 해설위원, 강연자 등 다방면의 활동이 반영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밴 플리트상은 한국 여성 최초 수상이라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전혀 예상 못했던 상이다. 처음에는 내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되는지 생각했다.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인 데다 스포츠 분야에서 받는 것도 처음이라고 하더라. 미국과 한국의 관계에 기여했다고 주는 상이라 영광스럽다. 많은 상을 받아봤지만 국가 간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상이어서 특별한 마음이 들었다. 여성의 입지가 달라진 것을 보여준 것 같아 더 의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과 한국의 관계에 기여한 자에게 부여하는 상’이라는 취지를 생각하면 그 누구보다 적임자다. 처음 미국에 진출했을 때와 비교해보면 어떤 변화를 느끼나?
내 삶의 반반을 한국과 미국에서 보냈다. 한미관계가 이젠 더 편해지고 뭔가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 느낌이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개인적으로는 두 나라 문화를 자연스럽게 경험하면서 편해졌고, 실제로 양국 관계도 그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번 수상 소식을 접하며 박세리라는 이름의 존재감, 상징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감사한 일이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얘기해주지만 그런 말이 나는 여전히 낯설다. 아직도 ‘이 상을 내가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운동만 해와서 그런 것 같다
은퇴 이후의 시간도 골프 선수 박세리로서의 중심은 그대로다.
은퇴하고 인재 육성과 관련된 일을 주로 하고 있다. 아직 사회초년생으로 불릴 만한 시간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걸 믿고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선수 박세리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누구에게든 존경받는 사람으로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 마음으로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삶의 중심이 잡히는 것 같다. 후배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도 있지만 존경하는 선배, 끌어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내 이름을 앞세우기보다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방송, 유튜브 등에서 활발히 활동해서인지 인기가 더 많아진 것 같다.
선수를 그만두고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방송은 원래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우연찮게 한두 번 했는데 섭외가 들어와서 조금씩 하는 거다. 팬들에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소통할 수 있다는 면에서 방송은 긍정적이다. 시간을 많이 투자할 수 없어서 스케줄을 조절하고 있다. 유튜브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자연스러움, 솔직함, 당당함이 박세리의 매력이다. 동의하나?
요즘 시대에 맞는 솔직함 때문인지 운동선수가 가진 성격 때문인지 그런 부분을 좋아해주는 것 같다. 자신감과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받는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많다. 내가 그런 걸 줄 수 있다니 더없이 감사하다. 운동선수 때 보지 못했던 모습을 통해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자신감과 긍정적인 에너지는 최고의 실력에서 나오는 건가?
항상 잘했던 건 아니다(웃음). 못할 때도 있었다. 실력보다 기본적인 성격인 것 같다.
은퇴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선수가 아닌 새로운 일상에 적응이 됐나?
선수 때랑 완전히 다른 패턴이긴 하다. 선수 때는 경기 일정과 컨디션에만 집중하면 되는데 지금은 더 많은 일을 하다 보니 내 컨디션과 상관없이 일을 할 때도 있고 하루하루가 너무 바쁘다. 만나야 할 사람도 할 일도 너무 많다. 열심히 달려온 결과인 것 같다.
바즈인터내셔널과 박세리희망재단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
바즈인터내셔널은 골프를 비롯한 다양한 스포츠 영역의 문화사업과 교육사업 업무가 중심이다. 2023년 3월 경기 용인시와 양해각서(MOU)를 맺고 R&D센터를 짓고 있다. 시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에서 스포츠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도 같이 어울리게 하자는 취지다. 내년 초 완공되면 회사를 용인으로 옮기고 센터에서 골프 아카데미를 운영할 예정이다. 재단에서는 골프대회도 열고 인재 양성을 위해 후원도 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한다. 미국에서 주니어대회도 열고 있고 아시아 주니어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믿음직한 재단으로 선수들이 가야 할 방향성을 추구하려고 한다. 재단이 추구하는 가치를 믿고 후원해주시는 분들과 함께 향후 여러 재단사업들을 진행할 예정이다.
공식석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말을 자주 남겼다. 본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그 이유가 뭔가?
후배 양성이다. 내가 골프를 시작한 26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굉장한 변화가 있지만 선수들 입장에서는 조건이 그렇게 좋아진 건 아니다. 선수들의 환경이나 문화가 개선됐으면 한다. 선배로서 해야 할 몫이 있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선배님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는 말은 들을 때마다 책임감을 느낀다. 그런 후배들을 위해서 목소리 한 번 더 내주고 한 번 더 안아주고 등 두드려주는 것이 선배인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골프뿐 아니라 어느 종목에서든 더 훌륭한 선수가 나왔으면 좋겠다.
개인의 노력으로만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사회적으로는 어떤 개선이 필요하다고 보나?
체육 시설을 갖추는 데 신경을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인재들이 많은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많지 않은가 싶다. 대회나 훈련 등을 위한 환경이 터무니없이 열악하다. 스포츠를 인기·비인기 종목으로 나누기 전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어느 분야건 꿈을 갖게 만들어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 환경이 갖춰져야 꿈도 꿀 수 있다.
임언영 기자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뉴스레터 구독신청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