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힘겹게 다시 찾은 소중한 일자리, 여성관리소장이 될 겁니다"
2014년 여름, 이유순(42) 씨는 집에 콕 박혀 있었다. 운이 좋아 일하게 된 대기업 연구센터에서 도망치듯 나와 집에 들어앉은 지 한 달. 남편은 출근했고 아이들은 등교한 터라 따로 할 일이 없었다.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이렇게 축 늘어져 있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란 생각이 들었다. 안 되겠다 싶었다. 무너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할 방법은 ‘재도전’이라는 답을 얻었다. 차분히 일자리를 알아보며 자신의 다이어리에 메모를 남겼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
그 후 2년, 이 씨는 오산여성새로일하기센터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올해 9월부터 주 5회, 하루 4시간씩 ‘공동주택 사무원 양성과정’ 교육을 받으며 2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사용하는 회계 프로그램과 사무 처리 과정을 습득했다. 자신감 회복에 효과적이라는 집단상담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새일센터 상담원의 도움을 받아 틈틈이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준비했다.
교육이 끝나기 이틀 전인 지난 11월 9일. 이 씨는 경기 오산에 위치한 국민임대아파트 관리사무소 공동주택 사무원으로 채용됐다. 1975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42세. 적지 않은 나이였다. 취업이 확정된 후 이 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라는 메모 옆에 ‘새일센터는 하늘이 나에게 준 기회’라고 썼다. 칩거한 지 2년여 만에 이 씨는 다시 세상에 나왔다.
그는 "오랜 방황 끝에 재취업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겐 커다란 선물"이라며 "무너졌던 자존감을 회복했다"고했다.
"어느 날 안방에 누워 있는데 둘째 아이가 "엄마, 어른도 넘어질 수 있어. 다시 도전하면 돼"라고 얘기하더라고요. 그 한마디를 듣고 펑펑 울었어요. 일자리를 다시 얻어야겠다는 용기를 가진 것도 아마 그쯤부터였을 겁니다."
일자리 줄고 나이 장벽 가로막혀 취업 불발
새일센터 도움 받아 공동주택 사무원으로 취업
도전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42년간 순리대로 살았다. 집안이 가난해서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했고, 결혼했다. 그러다 임신해 출산 2개월을 앞두고 퇴직했다. 아이가 크면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를 받아준 곳은 마트뿐. 일은 고됐다. 밤늦게 퇴근하고 주말에도 일해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건 감당하기 힘들었다. 근무한 지 네해쯤 됐을 때 그는 생각했다.
"주부의 삶은 하루하루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었죠. 반면 밖에 나가 일을 하면 즐거웠습니다. 일을 할 때 행복했지만 그만큼 저를 힘들게 한것도 일이었어요. 문득 행복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는 선까지 일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전업주부 생활이 시작됐다. 시간을 허송세월하며 보낼 수 없었다. 더구나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다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을 활용해 자기계발에 힘쓰자고 마음먹었다. 마침 집 근처에 여성회관이 있었다. 컴퓨터 자격증 대비반을 수강 신청했다. 고교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그다음 도전해야 할게 눈에 띄었다. 액셀, 파워포인트 등 문서 작성 프로그램을 익힌 그는 전산회계 자격증을 취득하기로 했다. 고교 시절에도 따지 못한 자격증이었다. 이 씨는 "1년 넘게 자격증 시험을 공부하면서 재취업 준비 과정이 즐겁고 보람찼다"고 말했다.

▶네 번째 일자리를 얻어 2년 만에 세상에 나온 이유순 씨는 “공동주택 사무원은 내가 내게 준 선물”이라고 말했다.
한 해가 지났다. 공부하면서 자긍심이 생겼다. 다시 일자리를 얻는다면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인생에 제동이 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4년 국내 대기업 연구센터에 시간선택제(오전 8시~낮 12시)로 근무하면서 당황스러운 순간이 종종 생겼다. 업무 매뉴얼, 가이드라인 등이 영어로 작성됐기 때문이었다.
"영어에 까막눈인 데다 준비 없이 입사한 터라 날마다 일하는 게 고역이었습니다. 근무 역량의 한계를 체감하고 나니 중년 여성이 일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알겠더군요."
그는 낯선 업무 환경과 역량 부족, 생활 패턴과 맞지 않는 근무시간으로 4개월 만에 퇴사했다. 모두가 선망하는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는 자괴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당혹스러움이 그를 뒤흔들었다. 낙오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10여 년간 일했는데 사회에선 쓸모가 없나 보다 싶었다. 실패를 겪은 후자신감이 확 쪼그라들었다. 그런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은 더 고통스러웠다.
다시 한 해가 흘렀다. 이 씨는 세상에 재도전장을 내밀었다. 이젠 복귀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 40대에 접어들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채용이 불발됐다.
회계 전문적으로 공부해 업무 역량 키우고파
꼼꼼함과 섬세함으로 여성관리소장 꿈 키워
그는 마음을 추슬렀다. 이 시간이 지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스트레스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참여하던 사교 모임을 정리하고 운동도 그만뒀다. 그저 자신을 편안하게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 생채기가 가라앉을 거라 믿었고 그때를 기다렸다"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뭔가를 하는 것이다’란 말이 있는데, 그게 힘이 됐다"고 말했다.
일자리를 찾아 방황하던 그때, 우연히 거리에서 본전단지가 변화의 계기가 됐다. 새일센터에서 공동주택 사무원 양성과정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씨는 집으로 돌아와 공동주택 사무원이 어떤 일자리인지 찾아봤다. 공동주택, 상가, 빌딩 등에서 전산회계와 실무 업무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두 가지 역량이 요구됐다. 친절교육(CS)과 전산회계. 이 씨는 두 가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에게 딱 알맞은 일자리였다. 이 씨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 장벽이 없고 꼼꼼함과 섬세함을 가진 중년 여성을 우대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일자리가 어디 있겠어요."

▶공동주택 사무원은 전산회계와 실무 업무를 처리한다. 이 씨는 “나이 장벽이 없고 꼼꼼함과 섬세함이 필요해 중년 여성이 일하기에 알맞다” 고 했다.
간절했던 일자리를 다시 얻은 이 씨는 목표도 생겼다. 새롭게 접하는 분야인 만큼 회계를 전문적으로 공부해 업무 역량을 키우고 싶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는말처럼 섬세함과 꼼꼼함으로 무장한 여성관리소장이 되는 꿈을 꿔본다.
"먼 길을 돌아온 만큼 일자리는 너무나도 소중해요. 예전에 일하며 누리지 못했던 설렘과 흥분을 만끽하고 있어요. 낯선 분야라 배워야 할 게 많지만 그래서 더욱 즐거워요. 누가 봐도 ‘즐겁게 일하고 있구나’, ‘일이 사람을 키우는구나’ 하고 느끼게끔 신나게 일하고 싶습니다."
글· 김건희(위클리 공감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201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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