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12월 5일 저녁(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잘바우티투스포룸 대강당. 말끔한 정장 차림에 오래된 바이올린을 손에 든 남자가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한빛예술단과 함께 ‘내 마음의 아리랑’을 연주했다. 강당을 감동으로 물들인 남자는 단원의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조심스레 무대 앞으로 나와 관객들에게 "고맙습니다" 하며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했다.
이날 600여 명의 교민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이는 김종훈(47) 씨다. 1급 시각장애인인 그는 1996년부터 국내뿐 아니라 세계 도시를 돌아다니며 무료 순회 연주를 하고 있다. 파독 간호사 5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연주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인 12월 7일서울 서초구 서초동 개인연습실에서 만난 김 씨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 도시를 돌아다니며 연주하지만 여독 같은 건 없다"며 쾌활하게 말했다. 두 평남짓한 연습실에는 피아노 한 대와 그가 매일 들고 다니는 바이올린이 전부였다.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내 마음의 아리랑’이 울려 퍼졌을 때 20년 전 독일에서유학했던 지난날이 떠올랐어요. 역경을 이겨낸 경험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귀중한 자원이 될 겁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종훈 씨는 독일 유학 당시 장애와 가난이라는 콤플렉스와 맞서 싸워야 했다.
그는 선천성 고도 약시로 태어났다. 생후 8개월 만에 백내장 증세가 나타나 다섯 차례 수술을 했지만 녹내장까지 겹쳐 왼쪽 눈은 실명하고, 오른쪽 눈은 교정시력이 0.01 이하가 됐다. 학교에선 도수 높은 안경 때문에 ‘돋보기’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자신을 따돌리던 친구들 대신 라디오와 카세트테이프를 끼고 살았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분에 어릴 때 차이콥스키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자주 들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특별활동부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연주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자 부모님이 무척 좋아하셨어요."
어머니가 달력 뒷장에 그려준 음표 보며 연습
연주자 되고자 유학 떠나 장애·가난 콤플렉스와 싸워
그 길로 김 씨는 바이올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악보를 보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날마다 달력 뒷장에 오선지를 그렸다. 음표와 쉼표가 주먹만 했다. 김 씨는 그걸 보고 또 보면서 왼손으로 바이올린 현을 짚고 오른손으론 활을 잡았다. 그에게 바이올린 연주의 매력은 현과 활이 만나는 그순간, 심금을 울리는 깊고 낮은 소리에 있다.
"바이올린 연주곡을 수백 번 듣고 바이올린활주법을 세 번이나 통독했는데, 완전히 소화하려면 좀 더 배워야 하겠더라고요."
김 씨는 바이올린을 제대로 배우려고 1987년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 특별입학전형이 없던 터라 비장애인 학생들과 함께 실기 시험을 치러야 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바이올린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가겠다는 그를 두고 주변에선 "전례가 없는 일이라 어려울 거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하게 합격해 4년간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언론사가 주최한 음악 콩쿠르에서 비장애인들과 겨뤄 3위로 입상했다. 지인의 음악학원에서 일하며 재미도 느꼈다. 나름대로 음악 생활을 성공적으로 시작한 듯해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얼마 가지 않았다. 199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면서 시련이 시작됐다. 그는 "이때부터 콤플렉스와 싸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우선 장애라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의 연주 자세는 다소 경직돼 있었다. 스스로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독일 학교에서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수법은없었다.
"그때 ‘아, 나는 아무래도 안 되나 보다’ 싶더라고요. 역량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어요."
바이올린을 그만두기 위해 다른 일을 알아봤다. 그런데 더 서글픈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점이다. 집안 사정이 넉넉했다면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타지에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려 낮에는 개인 레슨을 하고 밤에는 잠을 줄여가며 연습했다. 말라비틀어진 빵 조각에 수돗물을 받아 먹기 일쑤였다. 그에게 가난이라는 두 번째 콤플렉스가 생겼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활 따로 현 따로 연습
어제보다 오늘 더 발전하는 ‘대기만성형’ 연주자 되고파
도무지 돌파구가 안 보일 때 바이올린을 계속하게 된계기가 생겼다. 타지에서 홀로 생활하느라 몸이 안 좋아진 그를 한인 친구들이 병원에 데려다줬다. 침대에 누워 쉬는데 스피커에서 이름 모를 연주곡이흘러나왔다. 지친 그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문득 ‘내가 독일까지 와서 여기서 그냥 포기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 친구, 한인 친구들이 바이올린 하는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도와주는데 그만두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더라고요. 이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경직된 연주 자세를 고치기 위해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보통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왼손으로 현을 짚고, 오른손으로 활을 움직인다. 김 씨는 왼손으로 현을 짚지 않고 왼손을 활에 갖다 댔다. 연주할 때움직이는 자신의 근육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이런 고육지책이 통했는지 동작이 자연스러워지고 연주가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김 씨는 20년 전부터 대학병원을 찾아다녔다. 그곳에 입원한 아이들을 위해 처음엔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를 했다.
"연주를 마치고 떠날 때 배웅하는 아이들의 얼굴에 아쉬움이 보였어요. 섭섭한 얼굴을 한 아이들을남겨놓고 떠날 때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습니다."
김 씨는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이제야 자신이 보답을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2007년부터 시각장애인으로 구성된 하트 시각장애인 체임버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으로 활동했다. 2011년엔 2년간 경기도 수원 에이블아트센터에서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가르쳤다. 현재 그는 한빛연주단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김종훈 씨는 “역경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지만 그때 나를 도와준 이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그것이 이웃을 위해 연주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불편한 눈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은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세상을 향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예요.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이 있었기에 오늘날 제가 있을 수 있었어요."
김 씨는 12월 1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제11회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바이올린 하나로 장애라는 세상의 편견을 뛰어넘고 소외계층을 위해 연주하는 그를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이날 시상식에서 심금을 울리는 바이올린 연주곡으로 관객들에게 박수도 받았다. 김 씨의 꿈은 ‘희망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 듣고 자라야 연주가로 살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제가 바이올린을 연주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고요. 조금 느려도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발전하는‘대기만성형 연주가’도 있답니다."
글· 김건희 (위클리 공감 기자)/ 사진· 지호영 기자 201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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