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그림책 <이빨 사냥꾼>은 아주 얇다. 글도 얼마 없다. 페이지마다 실린 20개 남짓한 그림이 전부다. 그런데 그게 묘하게 강한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장편소설보다 더, 다큐멘터리보다 더. 그림 한 점이 때론 더 많은 얘기를 한다. 그 힘을 아는 사람, 조원희 작가다.
시작은 한 아이의 악몽이다. 사냥꾼 복장을 한 코끼리들이 무더기로 나온다. 코끼리들은 포획해둔 거인(아이)의 입을 연다. 톱과 스패너로 이를 뽑는다. 그리고 다듬고 깎는다. 이는 장식품과 장신구가 돼 팔려 나간다. 고급 상점에 진열된다. 쇼퍼들은 모두 코끼리다. 한마디 말없이 몇 장에 걸쳐 이뤄지는 이 기묘한 광경이 왠지 섬뜩하다.
아이가 잠에서 깬다.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그림책의 첫 대사다. 이내 ‘사람들에게 꿈 얘기를 해줘야겠다’고 다짐해본다. 하지만 들을 만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막 깨어난 아이를 지나쳐 가는 건 인간 사냥꾼 무리들. 손에는 일제히 코끼리 상아가 들려 있다. 저마다 갈 길이 바빠 보인다. 그 사냥꾼 무리 속에 발가벗은 아이가 덩그러니 있다.
그림책 <이빨 사냥꾼>(2014)은 코끼리에게 사냥당하는 꿈 이야기를 통해 상아를 사냥하는 인간의 탐욕이 정당한지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2월 23일, 아동 서적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 스페셜멘션(우수상) 수상이 결정됐다. 시상은 3월 3~6일 이탈리아에서 열린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기간에 치러졌다. 심사위원들은 “우리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다른 생명을 다뤄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전혀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강렬한 이미지에 실어 전한다”고 평가했다.

ⓒ조원희
작가는 말수가 적고 쑥스러움이 많았다. 아무래도 말보다는 글이 편하다고 했다. 그는 “언젠가 한 번쯤은 나도 라가치상을 받을 수 있을까, 혼자 상상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받고 보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수줍게 웃었다.
“즐겨 보던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그리게 됐어요. 상아를 죽 늘어놓은 풍경이 잔인함을 넘어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이상하게 보였죠. 그냥 지나가던 코끼리 이빨을 뽑기 위해 죽이다니요. 없어도 그만인 장식품을 만들자고 그런 짓을 하다니….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아이를 위한 그림책, 따로 있지 않아
그길로 붓을 들었다. 그 끝에는 대단한 힘이 실렸다. 어른이 봐도 묵직한 기운이 남을 정도다. 그 기운에 눌려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것이 그의 작품색이기도 하다. 조 작가는 “색이든 형태가 이질적으로 부딪히는 느낌을 즐기고, 글과 그림 속에 생각할 거리가 많게 연출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빨 사냥꾼>이 어른을 위한 그림책인가 싶었던 건 그래서다. 하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성인용, 아동용으로 나누지는 않는다고 했다.
“주제가 무겁고 표현 방식이 좀 세기는 하지만, 오히려 아이일 때 주제를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아이가 어른과 아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어린 시절을 돌이켜봐도 그렇습니다. 아직 모르는 부분은 있겠지만 사고의 다양함이나 정도, 깊이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연약하니까 지켜주고 싶은 느낌도 들지만 오히려 더 날카롭고 솔직한 부분도 있죠.”
조 작가는 “우리나라는 일본이나 유럽 등 그림책 문화가 오래된 나라들에 비해 그림책을 아이들 교육용으로 인식하는 부분이 있다”면서 “너무 폭력적이거나 누가 봐도 성인용 콘텐츠가 아니라면, 어렵다는 이유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홍익대학교에서 멀티미디어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림은 어릴 때부터 그렸지만 배운 건 한참 뒤다.
“혼자 이것저것 그리곤 했지만 미술학원을 다니지는 않았어요. 열네살 때 처음으로 아빠가 알고 지내던 화가의 화실에 따라가서 유화를 그려봤어요. 석류가 있는 정물화였고, 화가의 그림을 옆에서 보고 따라 하는 수준이었지만, 아직까지도 그때의 기름 냄새와 돌아오던 밤길에 얼마나 심장이 뛰었는지 기억합니다.”
숙명인가 싶었다. 부모님의 반대로 뒤늦게 입시 미술을 준비해 디자인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건 원하던 그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디자이너로 2년 정도 일하면서도 꾸준히 혼자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중 ‘힐스(HILLS, 한국 일러스트레이션학교)’를 알게 됐다. 그는 “그저 막연히 꿈꿨던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부터 그림책 작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야기꽃
‘자연과 동물’, 소소한 일상에서 영감
그림책을 만들면서 그는 꾸준히 자연과 동물을 소재로 삼았다. 첫 작품인 <얼음소년>,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혼자 가야 해>, 조형적 방식과 틀에서 선회한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가 그 대표작이다. 그는 “자연과 동물,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감정, 그 밖에 작고 소중한 것에 관해 그림으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노는 걸 좋아했어요. 동물원이나 공원 같은 곳을 즐겨 찾았죠. 중학생 때 집 근처에 조그만 사설 동물원이 있었는데 문을 닫을 때까지 거의 매주 갔던 기억이 납니다.”
다녀오면 좋으면서도 쓸쓸한 느낌이 들었단다. 동물원이 동물이 아닌 사람에게 좋은 장소임을 알아서다. 그래서 지금은 동물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날마다 집 근처 하천 주위를 걷고, 자주 뒷산에 간다. 영감도 이런 일상에서 얻는다. 다른 작품에서 귀감을 얻기도 한다.
“그림책 작가로는 사노 요코와 조 신타를 좋아합니다. 글도 재미있으면서 군더더기가 없고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들어서요. 서늘한 정서도 따뜻한 정서도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통과해 나오면서 주는 감동이 있는 듯해요.
그는 앞으로도 동물과 자연에 시선을 둘 생각이다. 하지만 얽매이고 싶지는 않다.
“다양한 작업을 하고 싶어요. 조형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이런저런 해보고 싶은 부분이 생기면 계속 바뀔 거예요. 이전에 무슨 작업을 했는지에 따라 다음 작업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도 있어요. 예를 들어 <이빨 사냥꾼> 같은 무겁고 진한 작업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좀 더 가볍고 경쾌한 작업을 하려는 마음이 커지죠.”
그 마음을 반영한 차기 작품이 바로 <중요한 문제>다. 30대 남성이 작은 사건으로 인해 흔들렸다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출간 여부는 미정이지만 ‘미움’이라는 감정을 다룬 이야기도 올해 작업할 예정이다.
그림책 보는 시선 넓어졌으면
계속해서 그림으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그는 작은 바람도 내비쳤다. 조 작가는 “그림책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아동용, 성인용으로 나누는 것 이외에 좀 더 단단하게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면서 “내 작업이 그림책을 보는 시선을 넓히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시장성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소재나 표현 방식이 더 새로운 작업이 많이 나오고, 독자도 연령층과 상관없이 다양해졌으면 합니다. 그림책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출간 자체가 힘들어요. 그림책 관련 공모전이나 출판 지원 산업이 좀 더 확대되면 도움이 되겠죠.”
그림책 작가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도 남겼다.
“<이빨 사냥꾼>의 경우 좀 더 밝은 느낌의 버전도 있었어요. 하지만 주제를 더 잘 드러내려면 차갑고 무거운 쪽이 맞다고 생각했고, 다른 출판사에서 거절당하기도 했어요. 출판사의 의견은 참고하되, 정말 자기가 해보고 싶은 건 용기 내서 끝까지 했으면 좋겠어요.”
박지현 | 위클리 공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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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