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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활동에 나섭니다" 권호진 주무관

그야말로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일이다. 외국계 보험사 CEO 퇴임 후 말단 공무원이 된 사람을 만났다. 2006년 외국계 보험사인 에이스화재해상보험 한국지사장으로 퇴임한 후 2015년 1월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올해 12월 22일 서울 서초구청 일자리경제과 사회적경제팀 주무관으로 정년퇴임한 권호진(60) 씨다.

권 씨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물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들, 사회적경제 사업을 담당하는 시·구청 주무관들, 퇴직한 사기업 직장인과 공무원 등이 권 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이 하던 일에서 손을 뗀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뭐든지 시작하기는 쉬워도 마무리하는 건어려운 모양"이라고 했다.

"퇴임이 두 번째인데도 실감이 안 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그래도 첫 번째 퇴임 때는 막연히 두렵고 무서웠는데 이번에는 마음이 편안해요. 한번 호되게 겪어봐서인지 이번엔 퇴직 이후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계획을 확실히 세웠어요. 자신 있습니다."

 

공무원 시험에 연령 제한 없다는 말에 도전
구청 들어설 때마다 나이 잊고 직급·업무만 생각

권 씨는 25년간 외국계 보험사인 에이스화재해상보험 한국지사에서 일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사장까지 지내고 2006년 퇴임했다. 회사를 나온 후 1년 동안 실컷 여행 다니고 친구들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매일 아침마다 집에서 나와 출근하던 사람이 집 안에 있으려니 어색하고 허전하더라고요. 그렇게 좋아하는 바둑도 퇴임 후엔 별로 재미가 없더군요. 그 무엇도 헛헛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어요."

외국계 기업에서 오래 근무한 권 씨는 영어를 잘했다. 그때 영어학원 사업이 떠올랐고 무작정 판을 벌였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계속 학원을 운영했다가는 손해를 볼 것 같았다.

그런 그가 돌연 공무원 시험에 도전장을 내민 건 2013년 1월. 나이 제한 없이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는 신문기사를 봤고, 사업으로 위축된 마음을 달래보고자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 첫 번째 시험에서 낙방했다. 나이 탓인지 암기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다시 1년간 시험 준비에 매진했다. 이번엔 출제 가능성이높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2014년 연말 경기도와 서울시 지방 9급 공무원에 둘 다 합격했고, 서울 서초구청 일자리경제과 사회적경제팀으로 배정받았다.

"제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보니까 시험은 전략적으로 공부해야 하더라고요. 학문을 하는 게아니니까 시험에 나올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게효율적입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 남들보다 더 전략을 세워 공부해야 했어요. 공부를 하다 보니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이런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었어요. 마침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해서 고민 끝에 A4용지 90장 분량으로 원고를 작성했죠."

이맘때면 지방자치단체는 주민들에게 한 해 사업을 보고하느라 바쁘다. 12월 20일 서초구청을 방문했을 때 1층 로비에선 각 과마다 지난 1년간 추진해온 사업의 성과와 의미를 전시하고 있었다. 그중 권 씨가 소속된 일자리경제과 사회적경제팀은 ‘서초장터’란 아이템으로 지난해 6월 서울시 공모사업에서 예산 3000만 원을 확보했다. 서초장터는 서초구청 앞에서 매월 마지막 주목요일과 금요일에 열리는 전통 장터다. 서초구와 결연을 한 지방 도시들이 특산물을 이곳에서 판다. 권 씨는 구청 바로 옆에 위치한 서초보건소 앞에서도 물건을 팔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만 해도 서초구는 사회적경제 생태계가 조성돼 있지 않았습니다. 서초장터 공모사업을 준비하면서 사회적경제의 모습을 점차 갖추게 됐죠. 사회적경제 틀을 만들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권호진씨

▶서초구청 앞뿐 아니라 서초보건소 공터에도 서초장터를 열자고 제안한 권호진 씨는 “제안이 성사됐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보람찬 순간이었다”고 했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남성이 권호진 씨다.

 

권 씨는 공무원 생활을 하는 동안 나이를 잊고 살았다. 매일 아침 구청 현관에 들어설 때마다 "나이 대신 직급과 업무가 자신을 말해준다"고속으로 되뇌었다.

"지난 2년간 팀의 막내로서 선배들에게 대우를 깍듯하게 하고 상사로부터 지시를 받으면 군말 없이 따랐습니다. 9급 공무원에 맞는 태도를 취하려고 했어요. 돌이켜보면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가진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했던 것이 이런 자세를 갖는 데 긍정적인영향을 끼친 듯합니다. 나이가, 이력이, 경륜이 나를 말해주는 게 아니거든요. 이제 우리 사회도 유연하게 변해야 합니다."

인생이 바뀌니 생각도 달라졌다. 25년간 사기업에서 일할 땐 이윤을 추구했지만 공무원이 되고 나선 공익을 생각하게 됐다. 어떻게 하면 사회에 공헌할 수 있을지, 공익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국가에 대한 헌신과 충성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젠 ‘국기에 대하여 경례’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말했다.

"저의 이야기를 들으러 생소한 곳에서 강의를 요청해옵니다. 주로 40, 50대가 많지요. 사업을 하고픈 사람들도 이야기를 들으려 하고요. 앞으로 단체를 만들어서 사회봉사도 하고, 퇴직한 사기업 직장인과 공무원 대상으로 강의를 해볼 생각이에요. 사회적경제팀에서 근무하면서 알게 된 고용복지플러스센터의 역할과 협동조합의 취지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사기업 일할 땐 이윤 추구, 공무원 된 후 공익 추구
"앞으로 사회봉사, 공익 가치 실현하며 살고파"

퇴직 후 그림 같은 집에서 한가롭게 사는 건 누구나 꿈꾸는 그림이다. 권 씨의 삶이 빛나는 건그림 같은 집이나 한가로운 일상 때문이 아니다. 나이가 무색할 만큼 도전정신으로 가득한 삶 때문이다. 그는 "인생에 정년퇴임은 없다"며 "정년퇴임을 맞는 이 순간도 그렇다"고 했다.

 

권호진씨

▶권호진 씨는 “공무원이 된 후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기쁨을 알게 됐다”고 했다.

 

권 씨는 며칠 전 스마트폰을 난생처음 마련했다. 지금껏 2004년 출시된 중고 폴더폰을 사용해왔다. 그래서 그의 휴대전화 가운데 하나는 번호가 011로 시작한다. 권 씨는 "외국계 보험사에서 사장으로 일할 때 사용하던 전화기"라며 "내겐 분신과 같다"고 했다.

"아이패드를 사용하고 있어서 그동안 스마트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요. 공무원으로 일하다 보니 애플리케이션(앱)을 내려받아야 할 일이 꽤 있더라고요. 사흘 전 첫 스마트폰을 마련했죠. 스마트폰 작동법을 배워야 하는데, 마침 공무원 대상으로 스마트폰 작동법을 알려주는 연수가 있어 신청했어요. 어제 첫 강의를 들었고 오늘 저녁에 마지막 강의를 들어요. 수강을 다 하면 이제 스마트폰을 잘 다룰 수 있겠지요. 이 또한 저에겐 도전입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권 씨가 서울 반포주민센터로 향했다. 공무원으로서 마지막 연수를 들으러 가는 발걸음이었다.

 

글· 김건희(위클리 공감 기자 )/ 사진· 홍중식 기자 201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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