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고소한 빵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본능적으로 냄새를 따라 도착한 곳은 서울 성동구 옥수종합사회복지관 4층 요리실. 사람들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밀가루와 달걀, 설탕을 넣어 버무린 반죽을 타르트 틀에 평평하게 채운 후 달콤하고 새콤한 블루베리를 가득 올린다. 그 위에 아몬드 슬라이스를 뿌린다. 마지막으로 오븐에서 25분간 구우면 ‘블루베리 타르트’ 완성.
이곳에서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홈베이킹 수업을 진행하는 전수진(40) 씨는 “쿠키나 빵을 만들 때 블루베리를 넣으면 먹음직스럽고 영양이 가득한 간식거리가 된다”며 “천연의 단맛으로 맛을 살릴 수 있는 게 블루베리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전 씨의 설명을 유심히 듣던 수강생 오현주 씨는 “강사가 제과•제빵에 관해 모르는 게 없는 데다 수강생들을 사로잡는 위트도 갖추고 있다”며 “무엇보다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요리법을 정말 쉽게 가르쳐준다”고 평했다.
호텔리어로 근무하다 결혼 후 경력 단절
여성발전센터 홈베이킹 수강 후 제빵사 꿈꿔
이 제빵사, 친절하다. 빵을 맛있게 만드는 법을 물으면 열이면 열 구체적으로 답해준다. 이 제빵사가 박수를 받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경력 단절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재취업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전 씨가 처음부터 빵을 만들었던 건 아니다. 1998년, 대학에서 조리를 전공한 후 특급호텔에서 호텔리어로 근무하던 그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가정을 꾸렸다. 전 씨는 3교대로 근무하는 호텔리어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가족을 맞았다.
주부의 삶은 고단하고 단순했다. 매일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면서 두 살 터울 아이들과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성장기 아이들은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 먹으면서도 배고프다고 툴툴거렸다. 간식거리를 사다 나르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전 씨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내가 직접 간식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아이들이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니 간편하게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빵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전 씨는 인터넷에서 요리법을 찾아 초코칩, 카스텔라, 머핀, 호떡을 혼자 힘으로 ‘뚝딱’ 만들었다. 빵을 만드는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두 아이의 엄마에서 제과·제빵강사로 변신한 전수진 씨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
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성용
“밀가루를 반죽하고 달걀을 풀어 거품을 내는 등 빵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시간을 들여 빵을 숙성시키고 토핑을 올려 모양내는 일이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과 같더군요. 밥만 차리다가 빵을 만드니까 대학에서 조리를 전공하던 때가 떠올랐어요. 제과•제빵의 매력에 푹 빠진 거죠.”
2008년 본격적으로 빵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마침 서울시 서부여성발전센터에서 홈베이킹 강좌가 열리고 있어 수강생으로 등록했다. 조리 전공자인 전 씨는 다른 수강생보다 눈썰미가 좋고 손재주가 뛰어났다. 제과기능사, 제빵기능사 자격시험도 단번에 붙었다.
그때 요리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는 전 씨를 주목하는 눈이 있었다. 홈베이킹 수업 강사가 전 씨에게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맡아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결혼 후 12년 만인 2010년 그는 강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목적지는 서울 목동에 위치한 청소년수련관. 초등학교 2~3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홈베이킹 수업을 열었는데 수강생은 총 4명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분 단위로 학원을 다니느라 제과•제빵 같은 방과 후 특기적성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 씨는 낙담하지 않았다. 초짜 강사에게 빵 만드는 법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학생들에게 보답하려고 재미있는 수업을 준비했다. 첫 번째 수업 주제는 ‘마들렌 만들기’. 전 씨는 마들렌에 얽힌 전설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 홈베이킹 수업’을 선보였다. 학생들의 집중도가 높아질 즈음 빵 만드는 과정을 과학 원리와 연결 지어 설명했다.
“케이크나 머핀을 만들 때 분자의 밀도에 따라 빵이 부풀어 오르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러면 밀도, 효소, 발효, 휴지(休止) 등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도 쉽게 받아들이더라고요.”
그의 수업 전략은 제대로 통했다. 홈베이킹 수강 신청자가 점점 늘었다. 괄목할 성과도 있었는데, 지난 6년간 홈베이킹 수업을 꾸준히 받은 학생들이 제과제빵사가 되겠다며 진로를 정한 것이다. 그중에는 제과제빵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학생도 있다.
체계적인 수업 위해 방송대 가정학과 진학
엄마나 아내 아닌 ‘전수진 강사’로 불리는 삶
제자들이 생기면서 전 씨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체계적인 수업을 위해 학업을 병행하기로 결심하고 2011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가정학) 3학년에 편입했다. 전 씨는 공부를 하면서 경력단절여성의 실태에도 눈을 떴다. 이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서울시 서부여성새로일하기센터와 함께 경력단절여성의 취업희망 실태를 조사해 졸업 논문으로 제출했다.
이런 철저한 준비 덕분인지 전 씨의 홈베이킹 수업은 점차 활기를 띠었다. 서울 시내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특기적성 홈베이킹 수업을 열었을 뿐 아니라 복지관 등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한 쿠킹 클래스도 열었다. 전 씨는 현재 5곳에서 홈베이킹 수업을 진행한다.
“그동안 제가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호칭은 ‘엄마’ 혹은 ‘아내’였는데, 홈베이킹 수업을 맡은 후 수강생들에게 ‘전수진 강사’라고 불려요. 잃어버렸던 ‘나’를 찾은 기분이죠.”

▶전수진 씨가 서울 옥수종합사회복지관에서 진행되는 홈베이킹 수업에서 수강생을 지
도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전 씨는 바쁜 와중에도 ‘특별한’ 프로젝트를 준비한다. 가깝게 지내는 제과•제빵 강사들과 힘을 합쳐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이다. 제과•제빵 종사자를 위한 플랫폼을 구축한다면 제과•제빵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현장에서 쌓은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을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무엇보다 경력 단절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한 전 씨는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적성을 고려한 경력단절여성의 재취업 사례가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부에서 직업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그럼에도 경력단절여성의 사회 진출은 끊임없이 시도돼야 합니다. 사례 한두 개가 모이면 큰 결실을 이룰 수 있을 거예요. 저의 도전이 경력단절여성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글 · 김건희 (위클리 공감 기자) 201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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