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나뭇잎의 초록이 넘쳐나던 여름도 가고 고요함 속으로 빠져드는 가을날 저녁,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원고 청탁을 받게 됐다. 쓰겠다고 선뜻 대답은 했으면서도 ‘풍요로운’이란 형용사에 가로막혀 머뭇거렸다.
사전에 따르면 ‘풍요롭다’는 ‘흠뻑 많아서 넉넉함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말이 물질이 아닌 삶을 수식할 때는 그 ‘많음’이 양을 떠나서, 어떤 의미 또는 가치를 담은 ‘많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풍요로운 삶이란 곧 의미 있게 잘사는 인생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세상에는 존재하는 인간의 수만큼 다양한 삶이 있고 저마다 나이나 놓여 있는 처지에 따라 누리고자 하는 풍요로움이 다를 수밖에 없다. 새삼스레 주위의 삶을 눈여겨보며 질문을 던져보게 됐다.

원고 청탁을 받은 이튿날, 책이 많아 성남 분당에서 택시를 타고 서울 흑석동 학교로 향하던 길이었다. 빠른 길로 간다고 고속도로로 들어섰는데도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 참에 나는 “도로에 차가 많아 운전하기 힘드시죠? 요즘 사는 게 어떠세요?”라고 택시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선을 행할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진다
“아, 도로에 차가 많아도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어릴 때는 자가용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잖아요? 대한민국, 최고입니다. 저만 해도 월사금이 없어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결혼해서 월세방에 살았는데….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서 돈을 벌어와 집도 장만하고,
세 딸도 대학을 나와 직장에 다니고…. 예순다섯 살이 넘었지만 개인 소유인 내 차로 퇴직당할 염려 없이 일할 수 있고….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매달 아프리카 세 나라에 기부하며, 내가 죽은 후에도 딸 셋에게 그 기부만은 계속해 달라고 부탁해 놓고…. 아주 행복합니다.”
뜻밖의 성실한 대답에 택시의 작은 공간은 아프리카까지 열려갔고 시간은 반세기의 삶으로 연결돼 해피엔딩의 소설을 한편 읽는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만난 제자와도 이야기해 봤다. 요즘 젊은이들은 경제적으로는 꽤 넉넉한 혜택을 누리면서도 대학을 졸업하고 그럴싸한 직장을 갖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듯 각종 자격증 시험과 면접 준비에 쫓기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 같은 건 해 볼 틈도 없는 것 아닐까? 그런데 뜻밖에도 제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어느 여름에 읽었던 소설의 한 구절을 가끔 떠올려요.
사람이란,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별을 그려야 하는 것이라는…. 아흔아홉 명이 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고 해서 그 길로 함께 뛰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고, 기꺼이 나머지 한 명이 되는 것이 힘들겠지만 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삶을 위해서는 낫다고, 아직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대한민국, 최고입니다”라는 긍정적인 말을 들은 것도,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별을 그리는 마음을 갖고자 한다”는 제자와의 대화도 흐뭇했다. 이들은 풍요로운 삶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이다.
삶은 여정이다. 바로 지금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하며, 다 아는 말이지만 선을 행할 때 삶이 풍요로워진다. 금전에 대한 욕심과 물질적 경쟁에 정신이 팔려 생명에 대한 존엄이 매우 희박해져 가고 있는 현실을 올해 우리는 참혹하게 지켜봐야 했다. 쌓아놓은 돈이나 사회적 지위를 제대로 된 가치를 위해 사용하지 않아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자신도 구더기 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잘못된 가치의 풍요를 좇은 허망한 결과이다. 사람끼리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것도 잘사는 삶을 일궈나가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인간은 한치 앞의 미래를 모르는 길 없는 길을 가고 있어 고독하지만 측은지심으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 지탱할 수 있다.
자유라는 것도 풍요로운 삶에 중요한 요소이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善)을 위한 자유를 선택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풍요의 조화가 멋진 삶
내용이 좋은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영적인 친절과 배려가 쌓이는 저축통장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속마음이 친절로 가득찬 진실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인정이 살아 있고 신뢰가 있어 세계인들이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그려 찾아오는 그런 나라이기를 바란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잠시 집 뒤에 있는 이매산을 산책했다.
며칠이 지나는 사이에 벌써 나무들은 저마다의 색깔을 물들여가며 하나둘 잎사귀를 떨쳐내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었다. 비워낸 그 사이로 비치는 부드럽고 청명한 햇살을 맞으며 삶에서도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청빈·청렴이라는 정신적 풍요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더욱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봤다.
우주 만물을 따뜻한 애정을 가진 마음으로 바라보며 효심사(孝心寺)의 성담스님 말씀대로 “덕분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답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혼자 미소 지어 봤다. 산길이었던 때문이었을까?
글·손순옥(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1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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