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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강물에 스스럼없는 삶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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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丹陽)에 사는 소설가를 만나러 출장을 가게 됐다. 꽤 여러 해 전의 일이다. 서울에서 문학 관련 잡지사에 근무하던 내게 인터뷰를 하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뽑은 지 얼마 안 된 소형차를 몰고 무작정 단양으로 떠났다.

초행길이었지만 단양은 그리 낯선 곳도 아니었다. 내 고향 정선과 단양은 한강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강원도와 충청도로 갈려 있기는 하지만 남한강은 정선에서 영월로 흘러 다시 단양으로 가는 순서로 바다를 향해 흘렀다.

같은 강이 흐른다는 것은 그만큼 풍경을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한강 상류는 뱀이 기어가는 모습이라 해서 사행천(蛇行川)이라 부른다. 구불구불한 강은 산을 품고 이리저리 흘러서 결국은 품에 안은 산을 돌덩어리 벼랑만 남게 만든다.

물이 급하게 흐르면 옥수수밭 머리 위로 장대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가 나는 여울이 되고, 한숨 쉬며 느려지면 둥근 모래톱이 늘어지는 편안한 동네가 나왔다가 금세 무뚝뚝한 얼굴로 굽이쳐 돌아가는 절벽들이 지키는 곳. 남한강은 그런 풍경들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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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나야 할 소설가는 적성면의 금수산이란 곳에 집필실이 있다고 했다. 승용차가 집 앞까지 올 수 있다는 말만 믿고 기세 좋게 당일치기를 예상하며 달려갔지만, 지방도로를 버리고 시멘트산길로 바뀌었다가 다시 비포장 길이 이어지는 그 작가의 집필실은 결국 배기량이 작은 내 차를 거의 실신 지경에까지 몰아넣고서야 나타났다. 충청도 사람의 느긋한 말투에 속았다고나 할까.

“내 차도 오래됐는데 다니는 데 아무 문제없어요.”

결국 한밤에 도착해서 인터뷰를 하고 하룻밤을 묵게 됐다. 단양은 강과 더불어 산세가 범상치 않은 동네였다. 단양이란 지명의 뜻이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동네라는 것도 나중에 찾아서 알았다. 고구려의 장수 온달이 이곳에서 전사했다면 그럴 만도 했다. 성을 쌓지 않아도 넘보기엔 아주 막강한 산들이었다.

마을은 댐에 잠기고 새로운 터전 ‘신단양’ 조성

전날 밤 고생한 나를 위로한다고 작가가 읍내로 데리고 가 밥을 샀다. 댐을 만들기 위해 예전 마을은 수몰되고 새로 조성한 읍은 그래서 신단양이었다. 산과 물의 유구한 세월에 비한다면 그 기슭에 집을 짓고 살아온 인간의 마을이 없어지고 새로 생기는 건 일상사라 할 것이다. 하지만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터를 잡은 사람들에게서 묘한 슬픔이 느껴진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강가에 소나무들이 있었다. 나무는 강 옆에 자라는 것이 그리 행복한 조건은 아니다. 강은 언제든 몸을 불려 주변을 덮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세월을 견뎌온 그 소나무들은 장을 보러 온 시골 아낙네처럼 말없이 관광 명승지로 알려진 절벽 앞에서 나를 바라봤다.

3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다시 단양을 찾았다. 평생 딱 한 번 만났지만, 만나서 얘기도 제대로 못했지만 사람들 앞에 서서 사회를 본답시고 땀을 뻘뻘 흘리던 내게 물을 한잔 가져다준 소년의 굿긴소식. 나중에야 그 아이가 나와 아주 가까웠던 동창의 외아들이라는 걸 알았다.

그 아이는 제 엄마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스무살 초반의 이른 나이에 돌연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단양에 멈춘 것은 내 마음이 더 갈 추진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습관처럼 소나무를 찾아가서 물었다.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때 다음과 같은 시를 얻었다.

강가의 소나무 / 삼월에 눈이 내리니 / 그가 떠났구나 / 차마 꽃을 볼 수 없는 마음이 / 겨울바람 불러 / 돌아서는 등을 지우며 / 벼랑 한 구비 넘어갔구나 / 내릴 수는 있어도 / 쌓일 수는 없는 / 허공에 걸린 일생이 / 이르면 얼마나 이르고 / 아쉬우면 얼마나 아쉬울까 / 그저 물처럼 돌고 돌아서 / 서로 뿌리가 다시 닿으면 / 손잡고 일어나 / 나무 한 그루 이루는 법 / 가지지 못하면 / 근심도 없으니 / 날이 밝기 전에 / 조금만 더 추워하고 / 조금만 더 흔들려라

때로 사는 게 고단해지면 소나무 밑에 누워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기나긴 낮잠을 잘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사람도 혹 내가 누리는 호사를 경험하고 싶다면 얼른 짐 싸서 단양으로 가볼 일이다. 그리고 강과 절벽이 만나는 곳에 파수꾼처럼 서 있는 소나무를 찾아서 한 그루 모셔올 일이다. 서두르길. 인생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기엔 너무 짧으니까.

글·전윤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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