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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의 수틀 속 꽃밭은 참 영롱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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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음력 팔월 하늘은 옥색이고 물은 시리도록 맑다. 새벽 푸서릿길을 덮은 찬 이슬은 이내 마른다. 양명한 햇빛은 대춧빛으로 물들어 상품(上品)이다. 벌써 밤은 아람이 굵고 대추들은 붉다.

벼멸구와 이화명충을 물리치고 비바람을 잘 견딘 벼들이 익어 가을 햇살 아래 황금물결을 이룬다. 배롱나무에는 붉은 꽃들이 한창이고, 뜰에는 달리아와 국화와 맨드라미가 흐드러졌다.

추석은 주춤거리는 기색도 없이 바로 온다. 아아, 추석이다! 추석의 유래는 깊다. 한반도를 거점으로 부흥한 옛 나라들, 즉 부여와 고구려와 마한 등에서 추수에 감사하는 뜻으로 ‘영고’와 ‘동맹’과 ‘무천’ 따위 종교 의례가 있었다. 달이 밝고 아름다운 때를 기려 조상님께 제사를 올리고, 산 자들은 음식을 골고루 나누고 가무(歌舞)를 즐겼다. 이것이 추석의 시작이었을 테다.

추석 때마다 벌초와 성묘를 하고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려고 고향을 찾는 민족 대이동에 나선다. 나라 안에서 으뜸 큰길인 경부고속도로는 물론이고 호남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는 몰려든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크고 작은 국도들도 고향을 찾는 이들의 차들로 붐빈다.

올 추석에도 태어난 하천으로 회귀하는 연어 떼와 같이 귀향하는 이들이 삼천만이라고 한다. 너도나도 바리바리 선물들을 안고 고향을 찾고, 안방 구들을 짊어지고 누웠던 노인도 깨끗한 옷차림으로 척추를 곧추세운다.

이날은 아이, 어른은 물론이고 까치도 강아지도 즐겁다. 추석빔을 받지 못한 아이는 솔기 터진 옷을 꿰매 입어도 입이 귀에 걸린다. 떡을 찌고 송편을 빚어라! 생선을 굽고 탕국을 끓여라! 한가위 크고 둥근 달 아래서는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돌아라! 푸성귀 일색이던 밥상에는 탕국과 기름진 지짐들, 별미 음식들을 올려라! 그런 날은 과식으로 탈이 나서 배앓이를 하고 화장실을 밤새 드나드는 사람도 생겨난다.

아이도 어른도… 까치도 강아지도… 즐겁다

모처럼 식구가 한자리에 모인 한가위! 팔월 상달 하늘의 달은 둥글고, 칠흑 어둠 낭자한 밤하늘에서 노숙하는 별들은 저마다 제자리에서 빛난다. 바람은 소슬하고 풀벌레 소리는 드높다.

이런 날은 고향집 외양간에 있는 소도 밤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서성거리다가 워낭소리로 적막을 깬다. 마당에 나온 늙은 아버지는 늦은 밤까지 불 밝힌 환한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자식들의 웃음소리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어버이들은 타관에 나가 사는 자식들의 몸에 탈이 없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으로 여긴다. 그 뿌듯함으로 마음의 주름을 펴고, 사는 것의 버거움은 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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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한가위는 농경사회가 만든 맑고 아름다운 풍속이고 겨레의 큰 명절이다. 곡식과 열매를 거둬들인 뒤 그 첫물들을 챙겨 조상들께 바치는 차례상을 차렸다. 추석은 조상님들을 기리는 그런 갸륵한 뜻 말고도 산 자들을 위한 날이다. 

농삿일은 선일과 앉은일, 마른일과 진일의 연속이다. 힘깨나 쓴다는 장정도 뼈가 휘는 농삿일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른다.

영욕(榮辱) 없이 늘 고단하기만 한 노동에 보상이 없다면 삶이 얼마나 팍팍하겠는가?

객지생활 고단해도 어릴 적 추억을 떠올려 봐야지

그래서 우리 슬기로운 조상들이 머리를 맞대 추석을 만들었다. 한 해의 물산들을 곳간에 그득히 쌓고, 이녁과 그 핏줄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포를 풀고 고단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게 마땅하다. 들에서 거둔 것들과 바다에서 건져낸 것들을 굽고 찌고 기름에 지져 내놓은 음식들을 친지들과 나누고 한 해의 수고를 눅이고 푸는 일은 슬기롭다. 추석은 그토록 오래된 곡진(曲盡)한 마음이 녹아 있는 날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환호작약하며 손꼽아 기다리던 추석이 시들해졌다. 추석의 설렘과 기쁨을 잃은 것은, 따져보니, 어른이 돼 객지를 떠돌며 지친 탓이다. 고향 상실은 세계 안에서 겪는 상실과 결핍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경험이다.

어느덧 내 어버이는 다 돌아가시고, 나는 고향을 떠나 멀리 살며, 품을 떠난 자식들은 태평양 건너 이국에서 제 둥지를 틀었다.

나는 올 추석도 혼자 마음에 그늘을 안고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며 지낼 것이다. 아아, 그러면 안 된다. 따뜻한 시 한 줄이라도 되뇌며 추석을 혼자 보내는 마음을 어루만지고 달래야 한다.

어린 시절 누이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던 수‘ 틀 속의 꽃밭’은 얼마나 영롱했던가! 이 향기롭고 풍성한 계절에 나만 쓸쓸하고 우울한 것은 억울한 일이다. 문득 눈을 들어 세상의 눈부시고 영롱한 일면을 보자.

올 추석에는 가까운 마트에 가서 송편을 사고, 먹음직한 녹두지짐 몇 장과 잘 익은 홍옥 몇 알도 사자. 맑은 소고기 뭇국을 끓이고 햅쌀로 밥을 짓자. 혼자 지내는 이가 있으면 그를 불러 훈훈하게 추석을 맞자. 이 가을을 수놓는 ‘보라, 옥빛, 꼭두서니’를 늠름하게 외며 저 어린 시절의 설렘과 기쁨을 되살려 음미해 볼 일이다!

글·장석주(시인) 2014.09.01

 

장석주 시인

1954년 충남 논산 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문학평론 <존재와 초월>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저서로는 <햇빛사냥>, <그리운 나라>, <풍경의 탄생>, <비주류 본능>, <새벽예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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