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떠든 사람 김재학.’ 4월 8일 서울 종로소방서 출동 통로 벽에 걸린 그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현장에서 돌아와 땀범벅이 된 현장2지휘대의 김재학 지휘대장은 그림을 보고는 껄껄 웃었다. “소방 현장에서 지휘하느라 항상 제가 제일 많이 떠들거든요. 그래서 소방관들 중 누군가 그렇게 적었나 봐요. 재미있네요.” 노란색 옷을 입은 아이가 낙서하는 모습이 담긴 그림은 소방관의 낙서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김 대장은 “늘 보는 똑같은 그림이면 그냥 지나칠 텐데, 그림에 적힌 낙서가 매번 바뀌니 출동하며 오갈 때 보면 재미있고 힘도 난다”고 말했다.
형이 동생을 업은 <두 형제>, 아이가 눈을 꼭 감고 있는 <숨바꼭질> 등 동심을 자극하는 여러 그림에는 소방관들을 응원하는 글이 많았다. “119아저씨 고마워요”, “수고 많으세요! 파이팅!”, “진짜 급할 때는 119에 전화하면 끝!” 등 오가는 시민들이 남긴 글들이 그림 곳곳에 빼곡했다. “수고했어 오늘도”, “세종로3팀 근무 오늘도 무사히!” 등 동료 소방관끼리 응원하는 글도 있었다.
승진이 미뤄진 상사를 응원하는 글도 눈에 띄었다. “팀장님, 힘내십시오. 다음에 꼭 진급하시길 바랄게요.”
한때 휑한 벽이었던 출동 통로는 이렇듯 소방관들이 마음에 힘을 얻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창작벽화가 황성보(40) 씨의 아이디어 덕분이다. 애초에 황 씨에게 주어진 일은 출동 통로를 여닫는 문에만 벽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계획이 바뀌었다.
“종로소방서의 요청을 받고 보러 왔는데, 출동 통로를 직접 보는 순간 그림을 전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잘해 보고 싶은 욕심에 작업 제안서 등을 직접 써서 종로소방서에 제안했죠.”
황 작가의 제안에 이석훈 종로소방서장이 “소방관들을 위한 일이면 얼마든지 좋다”며 흔쾌히 승낙해 ‘힐링벽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황 작가의 아이디어는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난해 다수 소방관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겪는다는 소식을 들은 뒤 소방관들을 돕고 싶었다. “고생하는 소방관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그림으로 소방관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싶었죠. 소방서에 벽화를 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일 출동에 지친 소방관들, 그림과 응원글 보며 ‘힐링’
소방관들의 힐링 공간을 만들겠다는 황 작가의 생각은 곧 실현됐다. 지난해 인천 서부소방서에 이어 올해 3월 20일 서울 종로소방서에 두번째 전시공간이 마련됐다. 조명을 설치하고 색을 칠하는 등 전시관으로 꾸미는 데 필요한 비용도 모두 황 작가가 냈다. 완성된 종로소방서 전시관에는 황 작가가 개인전에 출품했던 그림 6점이 걸렸다. 첫 전시 주제는 ‘추억과 동심’이다. 심리적인 안도감을 주는 그림들이다. 석 달여간 전시한 뒤 주제와 그림을 바꿔 올해 말까지 전시할 계획이다.
전시 공간 내 곳곳에는 하얀 분필이 놓여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그림 위에 낙서를 할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다. 황 작가는 “벽화의 매력 중 하나가 일상 속에 깊이 녹아들어 있다는 점”이라며 “그저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서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대로 그림은 이내 시민들과 소방관들의 낙서로 빼곡히 채워졌다. 낙서는 더 쓸 수 있도록 종종 지우지만 며칠도 안 돼 다시 꽉 채워진다.
힐링 공간으로 기획된 전시 공간은 사람들의 참여에 따라 다양한 소통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실제 시작한 지 2주밖에 안 되었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다는 낙서가 그림에 적힌 적이 있었어요. 며칠도 안 돼 없어졌던 물건을 찾았다는 댓글이 다시 적혔죠. 전남의 한 소방서에서 찾아온 소방관이 부럽다는 글을 남기기도 하고, 결혼했다며 축하해 달라는 글이 적히기도 합니다.” 천석훈 소방관은 “소방관이 되고 싶다는 한 소방관 지망생의 글을 보고 초심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소방서와 소방관이 시민들과 가까워진 것도 전시 공간이 만들어진 후의 변화다. 일상에서 가깝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지만, 전시관이 생긴 뒤로 소방서를 찾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늘었다. 소방차 사이를 가로질러 전시관을 찾는 시민들을 보는 것이 흔한 풍경이 됐다. 시민들이 한번쯤 소방관들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하는 것이 황 작가의 마음이다.
그의 바람은 전시관이 앞으로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공간’으로 남는 것이다. “제 그림은 항상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는 그림입니다. 저의 그림 앞에 서면 아무 제약도 필요 없어요. 누구든 와서 만져도 되고, 사진을 찍어도 좋고, 낙서를 해도 좋습니다. 서로 소통하며 위로를 얻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글·남형도 / 사진·전민규 기자 201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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