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예의바르고 명석한 아이들. 고향이 경주인 필자에게 양동(良洞)마을 아이들은 모범생으로 각인되어 있다. 학교에서 똑같은 잘못을 해도 양동마을 아이들은 대개 처벌이 면제된다. 양동마을 출신들은 경주에서는 일종의 특권층인 셈이다.
사실 양동마을 사람들은 특권을 누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조선시대 손씨와 이씨 3백호 정도가 살았던 이 마을에서 대과(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29명(이씨 22명, 손씨 7명)이나 나왔다. 한 마을 대과 합격자 수로는 전국 최고라고 한다. 그래서 양동 이씨를 나라의 대표적인 양반인 국반(國班), 양동 손씨를 경상도의 대표적인 양반인 도반(道班)이라고 불렀다.
훌륭한 인재는 훌륭한 가정에서 배출되고 훌륭한 가정은 훌륭한 어머니로부터 출발한다. 전통적인 대가족제도 아래서는 종갓집 맏며느리인 종부가 집안의 어머니 역할을 한다. 정영교(77) 여사는 양동 이씨 수졸당파의 14대 종부이자 이런 전통을 이어오는 대갓집의 마지막 맏며느리이다.

“아이고 와 힘이 안 들었겠어요? 이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헤쳐나가야 하나 하고 늘 걱정했지요. 저녁이면 몸이 녹초가 됐지만, 열이 펄펄 끓고 앓아눕지 않은 다음에야 아침에 일어나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종부로서 좀 고상한(?) 대답이 나올 걸로 기대했는데 너무 솔직하고 거침없는 답변이어서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자세를 흩뜨림 없이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하는 모습에서는 대갓집 종부의 위엄이 느껴졌다.
“종부한테 개인생활은 없습니다. 종부의 일생은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을 구김 없이 해나가는 것입니다.”
단호했다. 지나온 세월에 대한 회한이 있을 법한데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들 뻘 되는 사람 앞에서 체면치레로 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평생 지켜온 신념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4백년 된 수졸당을 홀로 지키는 마지막 종부의 자존심이자 자신이 다져온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라고 할까?
수졸당에서는 ‘4대 봉사’ 즉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4대조의 제사를 모셨다. 거기다가 추석과 설 명절까지 포함하면 1년에 열 번의 제사를 기본으로 지낸다.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다. 본부인과 사별하고 재가했거나 본처 외에 후처를 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달 한 번 이상 제사가 있던 셈이다.
제사 술은 보름 전부터 준비하는데 조금만 소홀히 하면 맛이 변하므로 지극정성을 쏟았다. 제사 떡은 기본이 다섯 가지로 계절마다 다르다. 겨울에는 시루떡, 본편, 백편, 찰편, 잔편을, 여름에는 증편, 모시떡 등을 쓰고 추석에는 감떡을 추가한다. 떡 방앗간을 이용하지 않고 집에서 쌀을 직접 빻아 떡을 찌므로 명절 때는 그야말로 난리다.


“사람들이 우르르 들고 우르르 나서 아예 수졸당의 정지(부엌)에는 문을 달지 않았습니다.”
부엌문을 닫을 시간이 아예 없었다는 이야기다.
‘접빈객’, 즉 손님접대도 종부의 주요책무이다. 사랑채 밖에서 ‘어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달려 나가야 한다. 아무리 바삐 나가도 행동이 굼뜨다고 어른들한테 야단을 맞았다. 과객접대를 잘하는 것이 양반댁의 의무이자 긍지이다. 그래서 일 년 내내 언제 올지 모를 손님을 위해 다식이나 안주거리를 마련했다. 술은 1급주, 2급주, 3급주로 나눠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옷이 남루한 손님은 떠날 때 바지저고리를 한 벌 새로 마련해주기도 했다. 제사·손님접대로 갖은 음식을 만들다보니 요리는 달인의 경지에 도달했다(1990년대 말 한 언론사 주최 전통요리 경연대회에서 ‘느리미산적’으로 1위에 뽑혔다).
이렇게 집안일에만 얽매이다보면 남편과 자녀에 대한 마음 씀씀이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지지 않았을까?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내 가족보다는 집안일이 우선입니다. 또한 내 가족보다는 살아계신 웃어른에 대한 시중이 먼저입니다.”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어른이 계시는 집에서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금기시되었다. 걸음마를 못 하는 아이들이 혹 손님상 위에 올라가더라도 어머니가 덥석 안고 가서는 안 되었다. 어른들 앞에서는 내 자식 보기를 남 보듯이 해야 한다.
부모자식 간 지켜야 할 법도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원래 수졸당파는 자손이 귀했는데, 시집와서 첫아들을 낳았다. 외모도 출중해 수졸당 종손아기는 “닭 무리 속의 봉황이다”며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맏아들이 네 살 때 남편이 그 귀한 아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5부능선 언덕 위에 있는 집이라 당시에는 길도 굽이지고 험해서 아이들이 걸어 올라오기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었다. “어른들 계신데, 어떻게 아비가 지 아를 태우고 댕기노(자기 아이를 태우고 다니나)?”라는 말이었다.
공동체 중심의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사사로운 애정을 표하는 것이 금지되는데, 어른들이 보는 앞에서 법도를 어겼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 남편은 어른들 앞에서 호되게 혼났다. 어른들이 살아계실 때는 부부 간에 대화조차도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남편이 제사상 장을 보러 갈 때는 부인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고 시어머니를 통해 간접적으로 장거리 내용을 물었다고 한다.

문득 사극에나 나올 법한 이런 종부의 일생을 택한 동기가 궁금했다. 강유겸전(剛柔兼全), 즉 강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갖춘 맏며느리지만 태어날 때부터 이런 숙명적인 삶이 예정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리 다 알고 시집왔지요. 종갓집이라고 해서 거부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전히 단호했다. 그 자신감은 바로 출신배경과 연결되어 있다. 정영교 여사의 고향은 역시 반촌으로 유명한 경북 영주의 줄포. 다산 정약용 선생의 후손인 나주 정씨 문중이다. 시문을 공부하던 할아버지는 조선이 일제에 강점되자 과거의 꿈을 접고 유림의 전통을 마지막까지 지키셨다. 일제의 압력에도 끝까지 상투를 자르지 않았고 한여름에도 홑버선을 신을 만큼 의관을 갖추고 생활하던 분이다.
그래서 당시 대부분의 조선사람들이 창씨개명을 하였지만 집안식구는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지켰다. 엄한 할아버지 아래서 종부의 도를 익혔기 때문에 어른 앞에서의 행실에 부담이 없었고, 어른들이 혼인을 결정할 때도 남편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조선 선비의 전형이었던 할아버지는 생전의 독립운동 활동이 사후에 알려져, 1990년대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후손들이 독립유공자의 지위를 획득했다.

스물네 살에 두 살 위의 신랑과 결혼하여 당시 풍습대로 친정에서 1년간 신행을 묵은 뒤, 이듬해가 되어서 시집으로 들어왔다. 1박 2일 걸려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먼 길을 찾아온 새색시 앞에는 대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팔십 줄에 들어선 시할머니, 환갑을 넘긴 시어머니, 혼자 된 시누이와 또 다른 시누이의 돌 지난 딸, 그리고 외거노비인 ‘가랍집’ 2가구, 정자지기 1가구, 머슴 1명이었다. 위로 모실 어른들과 다스려야 할 하배(下輩, 아랫사람)의 중간에서 집안의 허리 역할을 해야 했다.
진성 이씨 원촌대감댁 규수인 시할머니는 “당호(堂號)에 누가 되면 안 된다. 수졸(守拙)의 의미대로 어야든동(어떻게든) 나를 낮추고 세상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하면서 살아온 종부로서의 삶이 그렇게 반세기가 흘렀다. 이제 그 많던 식구들은 다 떠나가고 2남 2녀인 자녀들도 모두 출가했다. 20칸이 넘는 넓은 수졸당에 이제 혼자 남았다.
“아쉽지 않습니다. 숙명으로 알고 살았지요. 불만을 가지면 큰일나는 줄 알았습니다.” 음성은 또다시 단호했다.
양동마을 인재 배출의 배경에 종부의 ‘그 무슨’ 지혜나 역할이 숨어 있으리라는 당초의 기대는 없어졌다. ‘종부의 역할’과 ‘똑똑하고 예의바른 인물 배출’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상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의 삶은 자녀들에게도 입신양명하여 자신과 집안의 명예를 높이도록 강한 사명의식을 불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봉제사 접빈객의 공동체적 DNA’가 오늘날에도 양동마을 사람들의 유전자 속에 살아 있음이 명백한 것이다.
주말이라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이 자꾸 대문을 열고 들어와 바깥이 무척 부산스러웠다. 자리를 떨고 일어서려 하자 세상의 모든 식솔들에게 당부하듯 종부가 말을 이었다.
“요즘엔 효는 부족한데 부모의 자애는 넘칩니다. 효를 살려야 가정이 즐겁고 사회도 평안해집니다. 효의 본질은 사랑인데 효가 깊으면 모든 게 해결되지요.”
핵가족화가 가족갈등을 양산하는 시대, 부모와 조상에 대한 자기희생을 통해 가정의 가치를 회복하자는 종부의 주장이 KTX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귓전에 맴돌았다.
글·오기현 (SBS PD) / 사진·서경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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