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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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냇물 건너가서 쑥대밭을 쫓아내어 / 한쪽에는 뽕을 심고 한쪽에는 목화 심어 / 뽕잎일랑 누에치고 목화송이 솜을 타서…”
‘두리실 명주무명 짜는 베틀노래’의 도입부다. 여기서 큰 냇물은 경북 성주군 용암면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는 두의천을 말한다. 뽕밭은 안동 권씨 집안의 둘째 며느리인 조옥이 할머니(98·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명주짜기 부문 제87호)의 밭이고, 목화밭은 역시 같은 집안의 넷째 며느리이자 이 노래를 직접 지은 백문기 할머니(경상북도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무명짜기 부문 제16호)의 밭이다.
“이 노래를 만든 게 1995년인가 됐을 거야. 무명짜기 기능보유자가 된 게 1990년이고. 촬영 오고 취재 와서 자꾸 노래를 시키는데 원래는 부르던 노래가 없었거든. 오히려 안동 권씨 집안 여자가 노래 부르면 쫓겨났지. 그래도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노래 없다고 그럴 수도 없어서 결국 내가 지었어.”
길쌈은 이곳의 군수 권유검의 부인 여흥 민씨로부터 시작된 가문의 전통이었다. 집안 여자들에게 바깥일을 못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길쌈 잘하는 며느리가 들어오면 논밭을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길쌈은 가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이었다. 때문에 처녀들은 칠월칠석이면 직녀성과 견우성에 절을 하며 길쌈 재주 나누어 달라고 ‘별제사’를 지내며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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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기 할머니가 권씨 집안으로 시집을 온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서두른 결혼이었다. 배우기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고 또 그릇 잘 깨기 선수이기도 했던 어린 신부를 기다린 건 남편과 더불어 길쌈꾼들이었다. 시어머니 홍남이 씨를 비롯해 큰동서 강석경 씨의 솜씨는 이미 경지에 올라 있었다.
백문기 할머니는 군기반장이기도 했던 ‘독사 같은 동서’ 조옥이 할머니에게서 길쌈을 배웠다. 지금은 다섯째 동서 이규종 할머니가 명주짜기를 그리고 질부 안옥란 씨가 무명짜기를 전수받고 있다.
9월이지만 한낮 기온이 30.7도를 기록한 9월 4일, 오랜만에 마을회관에 놀러 가려던 백문기 할머니는 기자에게 붙들려 또다시 베틀 위에 앉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붙들린 건 기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위 탓에 주요 과정 몇 가지만을 시범 보여 달라는 부탁에도 아랑곳없이 백문기 할머니는 한사코 전 과정을 사진에 담게 해주었다.
어느새 할머니의 이마에선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무명을 만드는 일은 4월 하순 곡우를 전후해 목화씨를 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5월에 목화를 솎고 김매기를 하고, 6월에 목화순을 잘라주고 다시 김매기를 한 후 10월 초에 목화송이를 수확한다. 9월 중순이면 목화솜이 터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밭에서 딴 목화는 11월에 고르기와 씨앗기, 12월에 솜타기와 고치말기, 이듬해 정월에 실잣기, 3·4월에 실뽑기, 날기, 매기, 꾸리감기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베를 짤 준비가 끝난다. 물론 이런 일을 하는 도중에도 지난해 수확한 목화를 가지고 무명짜기는 계속된다.
무명 짜는 과정을 설명하는 백문기 할머니의 입에선 한탄과 감탄이 섞여 나왔다. “시간 여유라곤 없어. 부엌에서 밥 한 숟가락 뜨면 또 일하러 가야 했지. 마을회관에 화투 치러도 못가”하면서도 솜타기와 실잣기 시범을 보이며 “조상님 머리가 대단해. 어떻게 이런 방법을 다 생각해냈을까?”하기도 하고 “‘에헴’하며 수염만 잡고 살던” 양반 욕도 빼놓지 않았다. 과거엔 시골 아낙들의 일상이었다지만, “길쌈은 애쌈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된 일이다. 농사는 농한기라도 있지만 이놈의 길쌈은 도통 쉴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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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순, 목화꽃은 활짝 폈지만 요즘 백문기 할머니는 몸과 정신이 예전 같지 않다. 다리도 아프고, 한 말 또 하고 또 해 신경정신과 신세를 지고 있다. 지방과 사돈지를 도맡아 쓰고 사서삼경을 배우러 대구 읍내에 다닌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손주들은 내려오기만 하면 안타까운 마음에 “이제 고마 하이소, 고마 하이소”하고, 동네 사람들도 만나기만 하면 “이제 쉬엄쉬엄 사시오” 말하지만 열일곱 살 때 시집온 후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오던 일에서 손을 뗀다는 게 생각만 가지고 될 일은 아닌 듯했다. 어머니가 지키고 있는 고향은 옛날 같지 않은 몸을 주무르며 또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RIGHT]사진 하지권 / 글 신동섭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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