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1970년대를 살아간 한국인이라면 ‘조재기’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조재기 선수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메달리스트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금메달을 딴 북한에 종합순위에서 한참 뒤졌던 우리나라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종합 19위를 기록해 북한은 물론 주최국인 캐나다마저 제쳤다. 단 50명의 선수로 일궈낸 쾌거였다. 쾌거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조재기 선수였다. 양정모 선수가 레슬링에서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첫 금메달을 땄고 조재기 선수는 유도 무제한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유도 무제한급에서 메달을 딴 첫 한국인이었다.
조재기 선수는 은퇴 후 부산 동아대 체육학과 교수로 33년째 재직 중이며 2008년에는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등 경기장을 떠나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 지난 6월 12일 동아대 캠퍼스에서 그를 만나봤다.
어렸을 때부터 유도선수를 꿈꾸셨는지요.
“고등학교 때까지 입시 공부를 열심히 한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1학년 때 유도 감독님이 잠깐 보자고 하시더니 유도부에 들어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유도를 시작했어요. 몬트리올 올림픽에는 하마터면 출전 못할 뻔했습니다.
제가 헤비급이었는데 올림픽에서 메달 가능성이 없다고 헤비급은 대표단에서 제외하겠다는 방침이었죠. 당시 동아대 총장이 대한체육회 김택수 회장에게 전화해서 ‘혹시 비용 때문에 그런 거면 본인이 부담할 테니 데려가만 달라’고 부탁까지 하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나가게 됐어요.”
유도 무제한급에서 메달을 따셨습니다. 처음부터 무제한급에서 메달을 예상하셨나요.
“무제한급 경기는 체급별 경기가 끝나고 체급에 관계없이 나라별로 한 명씩 나와서 붙는 경기입니다. 지금은 올림픽에서 없어졌죠. 우리나라는 그때 무제한급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제 경기가 다끝난 후 생각을 해봤는데 잘하면 메달을 딸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헤비급 경기 때도 아깝게 3, 4위전에서 졌거든요. 그래서 무제한급에 나가고 싶다고 감독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안 된다는 거예요.
선수촌에서 머리를 빡빡 깎았어요. 그런 다음에 총감독님께 ‘무제한급 경기에 안 보내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하고 말해서 겨우 출전했죠. 무제한급 경기할 때 양정모 선수 결승 경기가 있었어요. 경기장에는 저랑 김희태 코치님 둘만 갔습니다.”
올림픽이 끝나고 귀국했을 때 환영이 대단했겠네요.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습니다. 꽃가루를 맞으며 시청 앞에 가보니 연단 위에 부모님이 앉아 계시더군요.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습니다. 제가 효도를 평생 딱 한 번 했는데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일본에서 유도 공부를 하셨죠.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텐리대(천리대)의 무도연구소에 갔습니다. 김희태 선생님이 ‘그래 한번 와봐라’ 해서 일단 한 달 동안 있기로 하고 간 것이었죠. 가자마자 일본에서 3등 하는 선수와 시합을 시키더라고요. 간단하게 이겼습니다. 그러니까 ‘야 한국에서 괴물이 왔다’면서 있고 싶은 만큼 있으라고 했어요. 메달을 따고 나서 3년 후에 다시 텐리대 무도연구소로 갔습니다. 그때는 대우가 달라지더라고요. 우리 무도장에서 훈련한 선수가 메달을 따고 교수가 돼서 나타났다고요. 그때는 정말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격하게 훈련을 하고 나면 몸무게가 5킬로그램이 빠지더군요. 날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오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한 건 몬트리올 다음의 모스크바 올림픽 때문이었습니까.
“네. 그런데 나가질 못했죠. 서방세계에서 올림픽 자체를 보이콧했으니까. 그 무렵 정말 혼란스러웠어요. 못 간다는 걸 일찍 알았습니다. 목표가 없어진 채 훈련을 하니까 일본 유학생활 마지막에는 정말 견딜 수 없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방에 틀어박혀 울기도 하고…. 그 무렵 제 후원회장을 하던 분이 오셔서 ‘조 선수는 너무 욕심이 많은 거 아닌가. 아버님이 좋은 몸을 주셨고, 조 선수는 열심히 해서 동메달까지 땄다. 그러면 자식을 낳아서 그 자식을 세계 최고를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게 바로 삼대론입니다. 그때부터 가슴속에 삼대론을 품기 시작했어요.”
지도자로 변신 후 자식을 금메달리스트로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셨습니까.
“자식들은 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자 하형주 선수가 금메달을 따지 않았습니까. 제 모든 기술을 전수해줬습니다. 하형주가 금메달을 딴 순간 ‘아 이제는 됐다. 제자가 금메달을 땄으니 삼대론을 이룬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경기인으로서 드물게 대한체육회 사무총장까지 지내고 행정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조직위원회에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메달리스트를 찾았습니다. 일본어를 하는 저와 영어를 하는 박신자씨가 뽑혔죠. 두 대회를 준비하면서 공무원들과 토론도 하고 일을 기획하는 법 등 행정에 대해 많은 걸 배웠습니다. 대회 마치고 부산에 돌아와서 부산체육회 사무처장을 맡게 됐어요. 그 후에는 대학 학생처장도 맡았습니다. 당시 대학 자율화 시기라 학내 분규가 많았거든요. 학생들 만나서 설득하고 취직시키고, 그렇게 한 시절 보내고 나니까 또 부산 아시안게임이 열렸죠. 부산 아시안게임 끝나고 제가 카타르 아시안게임 조정위원을 했습니다. 아시안게임 준비를 도왔죠. 그 후에 맡게 된 게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입니다. 베이징 올림픽을 잘 치러내느라 정말 열심히 뛰었습니다. 촌놈이 참 여러 자리에서 많은 걸 배웠죠.”
최근 전직 국가대표가 범죄에 연루되는 등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가 있지요. 이 중 두 개 이상 가지려고 하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국가대표는 명예를 주는 자리입니다. 선수생활 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운동만 해야 합니다.”
교수로서 인기가 있으십니까.
“지난해에 학교에서 강의 잘했다고 우수강의상을 주더라고요. 금메달 받았습니다.”
글·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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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